[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오는 22일 개봉되는 ‘남산의 부장들’(우민호 감독)은 1979년 제2의 권력자라 불리던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사살하기 전의 40일 동안의 행적을 그린 영화로 52만 부 이상 판매된 동명의 논픽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안가’에서 가수 심수봉과 여대생 신모 씨 등을 앉혀놓고 시바스 리갈을 마시다가 배석한 김재규 부장의 권총을 맞고 사망한 사건을 다뤘다는 건 삼척동자도 알 만한 팩트다. 우 감독은 2015년 ‘내부자들’로 스타덤에 오른 연출자다. 그는 왜 이토록 한국 정치사에 관심이 많은 걸까? 영화라는 매체의 기능과 역할은 뭣일까?

‘내부자들’은 특정 인물을 모델로 한 건 아니지만 그 속에 등장하는 여당의 대통령 후보, 재벌 회장, 유력 언론인 등은 충분히 추측과 대입이 가능한 인물들이다. 정치-재벌-언론의 유착관계와 그 끄트머리에 기생하는 정치깡패, 그리고 권력과 검찰의 밀월관계 등에 대해 그토록 생생하게 까발린 영화는 드물었다.

지난해 말 극적으로 통과된 공수처법이 왜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는지, 왜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게 검찰이 집착했는지, 왜 자유한국당이 공수처법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지, 왜 ‘태극기부대’가 ‘문재인 하야’를 외치는지 마치 이런 현상을 예고라도 한 듯 검찰의 정치적 이면을 낱낱이 해체했다.

어쩌면 ‘남산의 부장들’은 ‘내부자들’의 프리퀄이 될 수도 있다. ‘태극기부대’ 및 그들과 같은 성향을 가진 이들의 정신적 지주는 이승만과 박정희인데 아무래도 박정희의 더 영향이 클 것이다. 필자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의 역사를 함께했다. 두 사건 당시 다수의 국민들은 마치 이조시대 왕과 왕비의 죽음에 백성들이 했을 법한 통곡과 고통의 집단 히스테리 현상을 보였다.

그건 단체적 최면이었다. 광신도적 광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박정희는 한국전쟁 후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의 대한민국 국민을 먹여 살린 은인이었고, 쓰러져가던 한국의 경제를 일으켜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만든 구국의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일본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세한 다카키 마사오로서 만주 괴뢰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공산당원이었던 건 애써 외면한다.

‘남산의 부장들’은 그런 환상을 깨줄 것이다. 우 감독이 10·26을 경험했건 안 했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진실에 대해선 역사적으로 이미 모든 게 입증됐다. 다만 광신도들이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의 추종자들의 전가의 보도는 ‘그래도 경제는 살렸잖아’다. 과연 그럴까?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에 있었다. 당시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그는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민주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하는 바람에 무투표 당선됐지만 3·15부정선거로 발발한 4·19혁명에 의해 일주일 뒤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박정희는 이 혼란의 정국 속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에 성공했다.

당시 한국의 경제는 바닥이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박정희였기 때문에 경제가 산 게 아니라 경제 수준이 바닥이었기 때문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때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시민들을 안심시킨 뒤 자신은 도망가며 한강다리를 끊었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을 했으니 경제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봤을 때 정치적인 색깔을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는 이 사회의 은폐된 진실을 파헤쳐 보고픈 탐사의 욕구는 강한 듯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영화들은 적어도 한국의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왜? 영화는 드라마와 같지만 다르기 때문에. 제작 형식이나 과정은 두 콘텐츠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방영과 개봉이란 배급의 방식과 플랫폼이 완연하게 다르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드라마는 보통 40회(1회 30여 분 미니시리즈 기준)에 가깝게 방송된다. 하지만 영화는 단 1회 2시간 안팎이다. 영화는 임팩트가 강하다. 단 1회이기에 더욱 여운이 오래 남는다. 다시 보기가 용이하다. 드라마는 접근이 쉬운 만큼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쉽지 않다. 이에 비해 직접 선택한 뒤 이동해 돈을 주고 관람권을 사야 하는 영화는 그만큼 소중한 느낌이 짙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적 색깔은 개개인의 고유의 권한이다. 어차피 이 세상에는 ‘~주의’와 ‘~론’이 수천, 수만 가지 존재한다. 다만 타인에게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든가, 자신의 이념만 옳을 뿐 타인의 그것은 전부 틀렸다고 주장하든가, 그래서 그걸로 사회적 분열을 초래하는 행위 등은 삼가는 게 바람직하고 발전적이다.

그래서 영화가 옳다는 것이다. 만약 ‘남산의 부장들’을 ‘내부자들’과 같은 시점에서 드라마로 만든다면 진보 정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수 진영은 핏대를 세울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TV는 쉽게 아무나 접근할 수 있다. 만약 ‘태극기부대원’ 중 한 명이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남산의 부장들’을 보게 된다면 굉장히 불쾌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안 보면 그만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가 필요하다.

드라마가 감관계라면 영화는 예지계다. 드라마가 생활이라면 영화는 예술이다. 드라마가 오성과 소여라면 영화는 이성과 사유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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