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김원봉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조산총독부를 폭파하라

-다음 폭파작전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조선총독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의열단원 김익상이 책임을 맡았습니다. 김익상이 북경에 왔을 심산 김창숙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이때 나는 김익상에게 ‘조선의 독립은 2000만 민족의 팔할 이상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때 선두에 나가 희생됨이 마땅하다’는 말을 했는데 감격한 김익상이 조선에 잠입해 거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폭탄 두 개와 권총 2자루를 갖고 열차 안에서 낯선 여자와 얘기를 나누고 어린 아이를 안아주는 등의 행세를 하면서 경관의 눈을 피해 국내로 잡입하는데 성공합니다.”

-김익상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본명이 김봉남으로 경성 태생으로 노동자 출신입니다. 본래 용산철도국의 공원으로 다년간 근무하다가 1921년 6월 봉천으로 가서 광성연초공사의 기계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하고 평소 갖고 있던 비행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비행학교가 있는 광동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비행학교는 폐지가 됐고 북경으로 왔다가 나와 만나게 됐지요. 결국 의열단에 가입했고 총독부 폭파계획을 알게 되자 어려운 소임을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동지들 가운데 몇 사람은 김익상을 진정 믿을 수 있겠느냐며 시험을 했습니다. 송호라는 동지가 있었는데 그는 곤히 잠자는 김익상의 배위에 올라타서 얼굴에다 총을 갖다대고 소리를 쳤습니다. ‘네 이놈, 오랬동안 왜놈밑에서 고용살이 하던 놈이 혁명운동이 무엇이냐. 필시 왜놈의 간첩으로 우리의 동정을 살피러 온 것이니 죽일 수밖에 없다’고 하자 김익상은 껄껄 웃으며 ‘실없는 장난 그만 하고 내려앉게, 갑갑하이.’라고 응수했습니다. 그런 일을 거치며 9월 10일 큰 뜻을 품고 북경을 떠납니다.”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하고 총독부 침입

-경비가 삼엄한 조선총독부에 들어가기는 쉽지가 않았을 텐데요.

“그는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하고 검문하는 헌병에게 전기를 고치러 왔다고 하면서 안으로 들어갔지요. 김익상은 곧장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첫 번째 방이 비서과였는데 문을 열어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불발이었습니다. 다음 방인 회계과의 문을 열고 다시 폭탄을 던졌습니다.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집기들이 부서지고 관리들은 몸뚱이가 찢어져 날아갔습니다. 아수라장이 됐지요. 김익상은 복도를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면서 정문을 향해 달렸습니다. 헌병들과 마주치자 ‘2층에 큰일 났다. 올라가지 말라’고 하면서 혼을 빼놓은 뒤 총독부를 빠져나갔습니다. 곧이어 일본 목수로 위장하고 경의선 열차로 경성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양까지 가서 친구집에 하루 묵고는 신의주를 통해 북경에 오게 됩니다.”

▲ 의열단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북경까지 오는 도중 검문소는 쉽게 통과했습니까.

“하여간 김익상은 담력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기차를 탈 때에는 일부러 일본 승객들이 있는 칸에 타 일본인 행새를 하고 국경 검문소에서 ‘어디에서 온 사람이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김익상은 ‘그대는 이곳 국경을 지키는 경관으로서 일본사람과 조선인 하나 분간 못한단 말이오. 그래 가지고 어떻게 막중한 소임을 감당하겠소? 어제 서울에는 대사건이 일어났소. 정심 좀 차리세요.’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 국경 검문소를 통과했습니다. 북경을 떠나 총독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 우리 동지들을 만나기기까지 불과 일주일만의 일입니다. 참으로 신출귀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사라진 후 서울에서는 발칵뒤집혔지요. 범인은 온데간데 없고 단서조차 없으니 허둥지둥댈 수 밖에요. 7개월이 지나 상하이 황포탄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의열단에서 행한 일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황포탄 사건은 어떤 것인가요.

“1922년 3월 하순 무렵에는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제휴하는 길을 모색하던 중이었습니다. 놀라운 첩보를 알게 됐습니다. 일본의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싱가포르와 홍콩을 거쳐 상하이에 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왜국 군부의 중견분자로 일본 정부의 비밀스러운 사명을 띠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군 대장 암살은 기관 파괴가 아니라 암살이라는 점에서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일본 대장을 암살한다고 해서 조선독립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하면 독립투쟁의 새로운 국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종암, 오성륜, 김익상 등을 불러놓고 의논을 했습니다. 우리가 안 이상 이 침략자를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이토를 죽일 때처럼 3중의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선두 공격은 최고의 명사수인 오성륜을 지목했습니다. 그런데 이종암과 김익상이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좀암은 국내에 잠입했다가 동지들만 잃고 돌아온 것을 만회하려고 했고 김익상을 총독부 성공의 여세로 최적임자라고 우겼습니다. 결국 오성륜은 다나카가 배에서 내릴 때, 김익상은 일본 영사관에서 보낸 차를 향해 걸어갈 때, 이종암은 그 자가 자동차에 오를 때 노리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지요.”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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