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데뷔작 ‘투발루’(1999)로 대사 없는 영화의 새 장을 열었던 바이트 헬머 감독이 주특기를 뽐낸 ‘브라 이야기’는 훨씬 더 쉽고 재미있으며 재기 발랄하다. 여자의 가슴에 대한 판타지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품을 만하다. 왜? 여자아이도 젖을 먹고 자라고, 성장하며 풍만한 가슴을 꿈꾸기 마련이니.

전북 군산 혹은 베트남 하노이를 연상케 하는 아제르바이잔의 다닥다닥한 철길 마을. 은퇴를 앞둔 기관사 눌란은 보조 기관사를 태우고 매일 이 비좁은 선로를 운행한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기차가 다니지 않을 때 이 공간을 놀이터, 휴식처, 그리고 빨래를 널어놓는 장소 등으로 최대한 활용한다.

운행을 마치고 역사에 기차를 정차시킨 뒤 청소를 할라치면 맨 앞부분엔 마을을 관통할 때 걸린 물건들이 있기 마련인데 가장 많은 건 빨래다. 그러면 눌란은 퇴근 후 그 유실물들을 주인들에게 돌려주는 걸 잊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청소를 하던 날 그는 하늘색 브래지어를 발견하고 난감해 한다.

역장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으며 퇴임한 그는 마을 내의 여관에 방을 잡은 뒤 기찻길 옆 모든 집을 일일이 방문하며 브래지어의 주인을 찾지만 만만치 않다. 그러던 중 양말 보부상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브래지어 보부상으로 변해 가가호호 방문한다. 수입도 꽤 짭짤하고 재미있는 해프닝까지 생긴다.

브래지어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눌란의 순수한 의도는 그러나 자기 아내의 가슴을 확인하려는 그를 바라보는 남편들의 눈길엔 천인공노할 짓이다. 마을의 남편들은 연합해 눌란을 잡아 집단 폭행한 뒤 그것도 모자라 선로에 묶는데. 꽤 어려운 연출력의 헬머 감독이 이번에 대놓고 재미를 추구한다.

‘투발루’를 통해 문명과 철학이 쇠퇴한 독일을 비판하며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노래했던 그는 이번엔 페르시아, 오스만투르크를 거쳐 구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신비한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펼쳐 보인다. 늙수그레한 눌란은 산동네 돌담집에서 홀로 사는 노총각(?)이다.

동네 처녀와 눈이 맞은 그는 바리바리 선물을 싸 들고 그녀의 집을 방문, 어머니의 눈에 들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머니는 쇳덩어리 두 개를 들고 오더니 눌란에게 들어보라고 요구한다. 시험을 통과하려 노력하지만 어머니보다도 나약한 그는 결국 퇴짜를 맞고 처녀의 아버지와 담배 연기만 뿜는다.

산동네 사람은 처녀의 아버지처럼 정이 듬뿍 담겨있지만 어머니에서 보듯 세상 물정에 어둡진 않다. 외려 굉장히 계산적이다. 산 아래 기찻길 마을의 사람들은 순박한 눌란을 희롱하기까지 한다. 세 아이의 미혼모는 애들을 다른 방으로 내쫓더니 음악을 틀어놓고 야릇한 춤을 추며 눌란을 유혹한다.

한 미망인은 전 남편의 영정 사진과 촛불 앞에서 대놓고 눌란에게 섹스를 요구한다. 한 늙은 여자는 눌란을 집으로 부르더니 자신의 젊은 딸의 가슴을 보게 하고 딸은 나이답지 않게 뻔뻔하게 눌란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퇴임한 눌란이 브래지어 주인을 찾으려 애쓰는 여정은 ‘캉디드’의 로드무비다.

볼테르는 ‘순박한’이란 뜻의 캉디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18세기 중반 지배 계급이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와 종교재판소 등 성직자들의 부패상 등 정치, 철학, 종교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눌란은 회의주의자, 염세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역경을 거치면서도 낙천주의자였던 캉디드와 매우 닮았다.

60살은 됐을 듯한 눌란이 딸 또래의 처녀와 사랑에 빠진 것은 낙천주의와 비관주의의 경계를 달리는 ‘캉디드’의 아이러니와 유사하다. 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감옥 같은 집에 홀로 사는 늙은 그에게 미래가 안 보이는데 그는 인생이 희망적이라고 보는 듯 퇴근 후 빨래를 들고 마을을 헤맨다.

캉디드는 귀족 여인을 사랑한다는 의심을 받고 성에서 쫓겨난 후 온갖 고난을 겪는다. 그런데 순진한 그가 종교재판소 판사와 원숭이를 죽이고, 신부를 칼로 찌르기도 한다. 눌란은 브래지어를 주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일념으로 마을 여자들의 가슴을 확인하지만 돌아오는 건 박대, 모욕, 폭행이다.

그런데 그는 한밤에 사다리를 타고 남의 집에 침입, 잠든 여인의 가슴을 확인해본다. 아무리 선의의 목적일지라도 그건 무단 주거침입 및 성추행이다. 이렇듯 이 영화는 관념론과 유물론, 염세주의와 낙천주의의 이원론의 질문을 던진다. 경쟁은 치열하고, 삶은 녹록지 못함에도 살아야 하는 걸까?

마을엔 눌란이 묵는 유일한 호텔이 있다. 간판이 호텔이지 우리나라의 여인숙보다도 못한 열악한 숙소다. 호텔 앞엔 커다란 개집이 하나 있는데 여기엔 호루라기 소년이 기거한다. 동네 처녀가 개밥 주듯이 주는 밥으로 끼니를 잇는 그는 기차가 나타날 때쯤이면 기찻길을 달리며 호루라기를 분다.

소년이 여느 때처럼 호루라기를 불며 기찻길에 모인 사람들에게 경계신호를 보내던 중 선로에 묶인 눌란을 발견하고 구해준다. 그러나 소년은 그 ‘죄’로 호텔에서 해고당하고 개집에서 쫓겨난다. 소년이 브래지어와 콤비인 팬티를 빨랫줄에서 발견하고 그 집 문을 두드리려 하지만 눌란은 말린다.

아무리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일지라도 남의 사정, 사회적 관습, 법 등에 어긋나는 건 옳지 못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배려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는 신이 만든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란 뜻. 대사 하나 없지만 정말 웃기고 재미있는 재치 만점의 코미디다. 16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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