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우민호 감독은 장편 데뷔작 ‘파괴된 사나이’부터 후속작 ‘간첩’까지 단타를 치더니 ‘내부자들’로 드디어 홈런의 손맛을 봤다. ‘마약왕’이 자신이 이제 장타자가 된 걸 확인만 하는 수준에서의 희생 플라이였다면 ‘남산의 부장들’은 수준만큼은 최소한 투런 혹은 쓰리런이다. 한국 누아르의 정점이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이 박 대통령(이성민)과 곽상천(이희준) 경호실장을 총살하기 40일 전. 워싱턴에서 규평의 전우이자 전 중앙정보부장인 박용각(곽도원)이 하원의원들을 상대로 박 대통령의 비위를 폭로하고 ‘혁명의 배신자’라는 회고록 출간을 예고한다.

규평은 군대 후배였던 상천과 박통을 향한 충성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박통은 규평을 불러 용각 문제로 호통을 치고, 규평은 걱정 말라며 미국으로 날아간다. 용각을 만나 설득에 성공한 규평은 회고록 원고를 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귀국한다. 그런데 그는 용각에게 박통의 비밀 하나를 듣게 된다.

김영삼이 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미국 측에 박통을 끌어내리자고 도움을 요청한다. 박통은 상천의 말대로 김영삼을 잡아들이려 하지만 규평은 말린다.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마산에까지 이르자 박통은 상천의 의견대로 계엄령을 내리려 하지만 규평은 더 위험해진다며 극구 만류한다.

결국 박통은 대놓고 규평을 ‘왕따’ 하고, 상천의 규평을 향한 하극상은 더 심해진다. 그 와중에 용각의 처리를 놓고 규평과 상천은 신경전을 벌이는데 지고 싶지 않은 규평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10월 26일 박통이 갑자기 술자리에 규평을 부르고, 규평은 비장하게 최측근의 부하들을 소집하는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제3공화국을 설립한 뒤 중앙정보부를 창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여준다. 중앙정보부는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박정희의 권력을 유지시켜줬다. 동아일보 기자 김충식은 1990년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출간, 52만 부를 팔았다.

이 영화는 문제의 그날 규평이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가의 술자리에 무장한 부하들을 비밀리에 출동시키고 자신도 연회 중 숨겨둔 무기를 꺼내와 박통과 상천을 사살하는 당시의 숨 막히는 ‘혁명’의 과정을 수미쌍관으로 해 그 일이 있기 40일 전부터의 규평과 상천의 피 말리는 권력 투쟁을 그린다.

박통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지키는 호위무사 상천과 서열 2위를 사수하려는 규평이 ‘넘버2’의 지위를 확인하고 확고히 하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하는 게 서스펜스의 근간을 이룬다. 하지만 사실상의 전쟁은 규평과 박통의 갈등과 수 싸움이다. 이병헌의 연기 솜씨는 세련되다 못해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때만 해도 송강호와는 결이 다른 듯했던 그는 ‘밀정’에선 팽팽한 균형감각을 유지했는데 이번에 이성민과의 투 샷은 그 이상의 긴장감과 스릴을 던진다. 워싱턴에서 용각을 회유하는 시퀀스와 자신을 배제한 비 오는 날의 회동을 도청하는 시퀀스의 연기력은 놀랍다.

이희준은 상천 역을 위해 25kg을 증량할 정도로 노력을 쏟은 만큼 무르익은 연기력을 보이는데 이병헌과 더불어 이성민의 존재감 때문에 살짝 가린다. 이성민의 박통은 마치 ‘씬 시티’ 시리즈의 로아트 의원 혹은 그의 아들 캐릭터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악마적인 서늘함과 의외의 고독감을 형성한다.

비중은 적지만 곽도원과 재미동포 로비스트 데보라 역을 맡은 김소진은 제 역할을 충분히 해준다. 언제나 그렇듯 김소진은 자신의 공간을 책임지는 여배우라는 신뢰를 준다. 물론 이런 모든 노력과 조합은 우민호라는 마에스트로가 있기에 가능했다. 가장 세련된 한국 누아르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박정희 추종자들은 ‘그래도 경제는 살렸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1972년 시작된 유신체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인해 경제 악화를 가져왔다’고 두산백과사전은 쓰고 있다.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를 불안하게 봤고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이 발발해 안팎으로 불안했던 게 현실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행동의 배경에 대해선 3가지의 해석이 있다. 박정희가 차지철 경호실장의 의견에 따르고 김재규를 배척하면서 권력 다툼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그랬다는 것, 미국의 음모설, 그리고 우발적 행동이다. 영화는 첫째 해석에 무게를 주고 전두환 정권 수립도 거론한다.

말미에 울려 퍼지는 김재규의 육성은 당시 암울했던 시대상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당시 육군 고등재판은 범행의 이유를 스스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몰아붙이지만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와 국민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고 항변한다. 그는 또렷이 “난 군인이자 혁명가”라고 외친다.

박정희 광신도들에겐 우상의 파괴를 생생하게 재현해낸다는 점에서 꽤 불편한 불경일 수 있겠지만 왜곡된 역사, 불순한 프로파간다로 일그러진 진실을 탐구하는 데 있어선 더없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최측근에서 2인자로서의 권력을 맛봤지만 그걸 빼앗길 위기에 처했던 건 맞다.

그가 권력지향적이란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 그토록 무모한 행동을 할 만큼 아둔했을지는 의문스럽다. 과연 그는 유방의 한신인가, 뒤늦게 자유의 참뜻을 깨달은 혁명가인가? 권력의 추악한 이면을 까발리는 감독의 세련된 솜씨가 단연 두드러지는 수작이다. 2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