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영화 <암살> 스틸이미지 : 조승우(김원봉 역)

박차정과의 러브스토리

-만난 지 1년만에 결혼하게 됐는데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러브스토리를 얘기하는 건가요? 허허 참...3개월 뒤 북경대학에서 열린 중국 공산청년동맹의 비밀 초청강연회에 참석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토론회에서 박차정을 봤습니다. 화북대학 대표로 나왔는데 뛰어난 토론능력을 보여주더군요. 토론이 끝나 인력거를 같이 타게 됐습니다. 이때 좋아하는 책 얘기를 하다가 박차정은 일신여학교때 소설을 썼다고 하더군요. 제목은 ‘철야’,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어 고아가 된 채 겨울밤을 지내는 오누이가 등장한다고 하더군요. 그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화북대학까지 갔는데 헤어지면서 어떤 정감 같은 것이 생겨나더군요. 몇 달 후 비밀강연에서 다시 만났을 때 화북대학 기숙사 교정을 같이 걸었습니다.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습니다. 플로베르의 수필 얘기도 했고 앙드레 지드의 소설 얘기를 하다가 결혼하자고 청혼했지요. 일주일 뒤 둘은 결혼했습니다. 그때가 1931년. 박차정은 22세, 나는 34세였습니다.”

-이후 부인은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우선 의열단 핵심멤버가 됐습니다. 1932년에는 나와 함께 남경으로 거주지를 옮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임철애. 임철산 등의 가명을 사용하며 여자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나는 1935년 남경에서 좌우 독립단체 9개를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습니다. 이때 부인은 1936년 이청전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혁당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모든 조선의 여성들이 총단결하여 민족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것을 주창했습니다. 또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창립되자 산하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의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의용대원의 사기진작과 선전활동에 매진했습니다.”

-그런 활동을 하다가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지요.

“1939년 2월이었습니다. 강서성 곤륜산 전투 중에 큰 부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37세 일기로 세상과 이별을 했습니다. 정부는 순국한 박차정에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부인이 돌아가시기 전인 1938년 7월7일 오랫동안 구상해온 조선의용대 창설계획안을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제출하게 되지요.

“그때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은 장개석이 맡고 있었습니다. 애초에는 조선의용군이었으나 자국에서 외국군대가 창군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는지 조선의용대를 쓰라고 했습니다. 조선의용대 창설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이들 중에는 임시정부에 실망하고 발길을 조선의용대로 돌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1938년 10월10일 오전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구 중화기독청년회관에서 결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총대장에는 내가 맡았고 1구대장에는 박효삼, 2구대장에는 이익성이 각각 맡았습니다. 조선의용대 창설은 여러 측면에서 한국독립운동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건을 서두르게 한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비록 조선의용대가 중국 정부의 통제와 지원을 받는 불가피한 상황에 있긴 했지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무장부대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1942년까지 기관지 ‘조선의용대통신’을 발행하면서 활동상황을 자세하게 외부에 알렸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가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편입시키면서 그해 5월 종간됐습니다.”

-약산 선생이 임시정부에 열심히 참여하게 된 것은 언제입니까.

“1941년 4월 민족혁명당 제5기 제4차 당중앙위원회를 열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용대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고 나는 군무부장에 취임했습니다.”

광복군 부사령관

▲ 김원봉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임시정부와는 이념이 다른데 쉽게 합쳐질 수 있었나요.

“지난 수십년간 김구 중심의 우파 민족운동세력과 상당한 수준의 각을 세워왔는데 나로서는 큰 결단이었습니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기까지는 국민당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습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공산당 세력의 연안 쪽으로 넘어간 데 대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지요. 어쨌거나 우파와 좌파 민족운동세력이 이념과 노선을 초월해 합쳐진 것은 독립운동진영에서는 환영할만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하지요.

“예 그렇습니다. 1942년 12월 5일에 취임하고 1945년 6월1일 사임할 때까지 약 2년반 동안 한국광복군의 발전과 항일투쟁에 힘을 쏟았습니다. 조선의용대의 합류로 광복군의 전력은 크게 향상됐고 사기도 높아졌습니다. 조선의용대 출신들은 대부분 중국의 정규군관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그만큼 전술전략에 탁월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경상도 대표위원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42년 10월 25일 개최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나와 유자명, 김상덕, 손두환 등 조선민족혁명당원 6명과 함께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됐습니다. 과거 한국독립당원이 전부였던 의정원에 재야 각 정당과 무소속 인사들이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또 임시정부는 1944년 4월 20일 개최된 제36차 회의에서 군무부장에 임명됐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김구 중심의 민족조의 우파계열에서 장악해 내실이 별로 없는 직위에 불과했습니다. 행동반경이 그리넓지 않았지요.”
-중경 생활을 얘기한다면 시련과 슬픔이 겹치는 시기였나 봅니다.

“1943년 초 연안으로 진출해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던 윤세주 등 7명의 조선의용대원이 태행산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절친한 동지들이었기에 슬픔은 더욱 컸습니다. 그 무렵 부인 박차정이 세상을 떠났고 김구의 아들 김인도 이곳에서 사망했습니다. 부인을 보내고 혼자 지내던 중 1945년 1월 백범의 주례로 스무살 아래의 최동선과 재혼했습니다. 최동선은 3.1소년단장과 조선의용대 소년단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아버지 우강은 민족혁명당 중앙감찰위원으로 막역하게 지냈습니다. 최동선은 내 곁에서 비서역할을 했는데 부인이 삼망한 이후 가까워졌습니다. 부인이 운명할 때 최동선에게 남편을 보살펴달라는 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마흔 일곱에 첫아들을 보게 됐는데 망명지 중경의 한자를 따서 중근(重根)이라고 지었고 환국 뒤 서울의 감옥에서 둘째를 얻었습니다. 철장에서 소식을 들었기에 철근(鐵根)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김원봉은 1945년 12월 2일 1진 백범에 이어 2진으로 환국길에 올랐다. 1918년 9월 고국을 떠났으나 꼭 27년만의 일이다. 조국 강산을 보면서 얼마나 벅찬 감동이었을까. 먼저 떠나간 동지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서울에 도착한 김원봉은 임시정부의 군무부장 자격으로 귀국인사를 했다.

금후 정치는 인민을 행복스럽고 자유스럽게 하기에 힘쓸 것은 물론입니다. 오는 도중에 발을 벗고 남루한 의복을 입은 동포를 보니 잔혹한 일본 침략정치 하에서 얼마나 신음하였는가를 알 수 있었으며 해외에서 자유스럽게 지내온 우리들은 오히려 편안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 27년간 풍상을 다 겪으면서 투쟁해오던 동지가 많이 세상을 떠났고 우리들이 환국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감회가 착종하여 목을 메이게 합니다.(동아일보 1945년 12월3일자)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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