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의 나라 ‘알바니아(Albania)’ [김권제 칼럼]

김권제 칼럼니스트l승인2020.01.30l수정2020.02.0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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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김권제의 생활어원 및 상식] 알바니아(Shqipëri/Shqipëria; 슈치퍼리/슈치퍼리아), 알바니아 공화국은 동남유럽의 국가이다. 70만명의 티라나는 최대 도시이자 수도이다. 발칸 반도에 위치해 북서쪽은 몬테네그로, 북동쪽은 코소보, 동쪽은 마케도니아 공화국, 남쪽과 남동쪽은 그리스, 서쪽은 아드리아해, 남서쪽은 이오니아 해와 접한다. 오트란토 해협을 중간에 낀 알바니아와 이탈리아 거리는 72km다.

국토의 70%인 산악 고지대(북쪽, 동쪽, 남쪽)와 농경지가 집중되고 인구밀도가 높은 서부 해안 저지대로 구분된다. 최고봉 코라프 산은 코소보와 마케도니아 국경의 삼각지대에 걸쳐 있다. 강들은 서쪽 아드리아 해로 유입된다. 발칸 반도에서 가장 크고 깊은 북서부의 슈코더르 호와 남동부 오흐리드 호등3개의 구조호와 부트린트 호 등 작은 구조호에 13개 섬이 있다.

해안지대는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에 온화하며 비가 많고, 여름에는 건조하고 덥다. 대륙성 기후인 내륙 고원지대(1,500m 이상)는 겨울에 춥고 눈이 자주 내리며 여름에 덥다. 저지대 겨울은 대체로 온화해 평균 기온이 7°C 정도로 여름에는 평균 24°C 날씨이다. 고지대 알바니아알프스 산맥의 강수량은 1,880~2,500㎜ 이상으로 자주 비가 오는 반면, 대부분의 동부 국경 지역은 800㎜ 이하다. 저지대의 강수량은 연간 1,000~1,500 mm 정도이다. 서부의 프로클레티예 산맥은 유럽에서 가장 습윤해서 연중 3,100 mm가 내린다.

역사를 보면, 인간이 정착한 시기는 구석기 시대이다. 알바니아인들은 고대 인도-유럽계의 일리리아인의 후손들로 B.C 1000년부터 발칸 반도 서부에 살아왔다. 아드리아 해 동부 지역과 아우레스 강 어구까지가 영역으로 지역 전체를 일리리아라 했다. 아르디에이 왕국은 피예브라투스 2세의 아들 아르곤이 북쪽의 달마치아에서 남쪽의 비요서 강까지 영토를 확장해 슈코더르를 수도로 삼았고, B.C 230년 그의 사망 후 왕비 테우타가 이오니아 해까지 진출하며 로마인들을 자극했다. B.C 168년까지 3차례 전쟁에 패하며 로마 속주 일리리쿰의 일부가 됐고, 395년 콘스탄티노플에 합병되었다. 3~5세기에 서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을 받았고 6~7세기에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았다. 아르바논 공국(알바논)은 1190년 크루여의 프로곤이 세운 중세 첫 알바니아인의 독립국가다. 마지막 후손 드미트리 사망 후 공국은 그리스인 그레고리 카모나스  등이 다스렸고, 공국은 1255년 해체됐다. 카를로 1세는 1271년 에페이로스 전제공국을 정복한 지역에 중세 알바니아 왕국을 세웠다. 1272년 2월 그는 알바니아 왕국의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왕국은 두러스에서 부트린트 해안까지 영토를 넓혔다. 알바니아 왕국 탄생 후 발칸 지역에 가톨릭교가 퍼졌다. 그의 사촌 옐레나 안주이스카는 북부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를 통치했고 이후 1331~1335년까지 세르비아 제국이 알바니아 왕국을 지배했다. 세르비아 제국이 분열되자 여러 알바니아 공국들이 분리됐다.  

오스만은 1431년 알바니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러나 1443년 국민영웅 스칸데르베그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지역 군주들을 통합하고 중앙권력 체계를 도입해 알바니아의 군주가 됐다. 오스만은 서유럽 정복을 위해 알바니아를 발판 삼았고, 재정복 시도마다 스칸데르베그가 막았다. 그는 오스만과의 싸움에서 나폴리, 베네치아, 라구사와 교황의 재정과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냈다. 오스만이 진출하며 이슬람교가 제3 종교로 유입됐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알바니아인들은 제국 내에서 고위직을 맡았다. 이슬람화는 점진적으로 진행이 됐는데, 본격적 확산은 17세기부터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개종했고, 동방정교 교도들은 18세기에 개종이 시작됐다.

1878년 6월 코소보 빌라예트 프리즈렌에서 동맹이 결성됐다. 오스만 관리들은 프리즈렌 동맹이 무슬림 영주들과 오스만 제국 행정부 인물들로 구성되어서 지지했다. 압둘 프라셔리의 지도 아래 동맹이 알바니아 지역의 자치와 코소보, 스쿠타리, 마나스티르, 야니아 네 곳의 주를 알바니아 주 하나로 통합을 요구하자 오스만은 지지를 철회했다. 동맹의 군대는 몬테네그 군대를 이기는 등 선전했으나 오스만 군대에게 패했다. 1912년 알바니아인들이 다시 봉기했고, 오스만 제국은 발칸 전쟁에서 패했다.

1912년 11월 28일 남부 블로러 만민 회의에서 의회가 결성되며 이스마일 체말리가 독립을 선포했다. 1913년 7월 29일 런던 회의에서 독립이 인정됐다. 알바니아 군주인 빌헬름 비디가 공국의 첫 군주가 됐다. 새 정부에 불만인 농민들이 봉기하며, 에사드 파샤 톱타니와 이슬람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반란이 확산됐다. 1914년 5~6월 이사 볼레티니와 코소보에서 온 북부 카톨릭 지도자 프렝크 비베 도다의 수하들이 1914년 8월 반군에 패배했다.

알바니아 공국은 알바니아 공화국(1925-1928)으로 대체됐다. 1925년 4명 섭정체제가 끝나고 조구 1세가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1928년 군주제로 대체됐다. 1939~1943년 동안 알바니아 왕국은 이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왕국의 보호국이자 속령이었다. 1941년 11월 소규모 공산주의자들이 티라나에서 공산주의 정당을 창당, 엔베르 호자와 11명의 중앙 위원회를 설립했다. 1943년 이탈리아의 항복 후, 나치 독일이 알바니아를 점령했다. 민족주의 발리 콤페타르는 티라나에 중립 정부를 출범, 독일과 함께 공산주의 국가해방운동 단체를 배척했다. 공산 게릴라군은 재결성되어 1944년 1월에 남부 알바니아 대부분 장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알바니아는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내전상태에 들어갔다. 1944년 여름 공산 게릴라군이 남부 알바니아에서 발리 콤페타르를 몰아냈고, 독일군이 철수하자 게릴라군은 1944년 11월 29일 알바니아 전역을 해방시켰다.

엔베르 호자와 노동당의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1947년 알바니아의 첫 철도가 완성되고, 개혁법으로 토지 소유권을 농민들과 노동자에게 할당했다. 이 시기 알바니아는 급격한 경제성장과 교육과 의료 보급에서 진전을 보였다. 1945년 8월 농업개혁법으로 종교단체 재산이 국유화되며, 수도원과 교구 토지들도 몰수당했고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되거나 사형당했다. 1967년 엔베르 호자는 그해 법률에서 모든 파시스트, 종교, 전쟁주의, 반공산주의 활동과 프로파간다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비밀리에 종교활동을 계속했다.

1989년 전국적 시위로 1990년 공산 정부가 자체적 개혁을 했고, 공산주의자들은 1991년 총선에서 다수석을 확보했다. 1992년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이 해체되며 현재 알바니아가 세워졌다. 1992년 3월 경제 붕괴와 사회 불안정으로 신규 창당된 알바니아 민주당이 권력을 잡았다. 1997년 피라미드식 투자회사 파산으로 투자금 회수를 위해 평화시위를 했다. 시위는 1997년 2월 정부군 발포로 폭력화 되었다. 1997년 4월 이탈리아 중심 유엔 평화 유지군이 알바니아에 진입했다. 알바니아 사회당의 1997년 총선 승리로 정치적 안정이 됐다. 1989년 혁명 이후 알바니아는 서유럽 국가들과 외교를 맺기 시작했고, 2014년 4월 NATO정식 회원국이 됐다. 2017년 초 유럽 의회는 2017년 총선거가 자유롭고 공평하게 진행되어야 알바니아의 유럽 연합 가입을 긍정적으로 고려하겠다고 하였다

알바니아는 의원 내각제의 공화국이다. 5년 임기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 의회에서 3/5 이상의 표를 받아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군 총사령관을 겸하며 총리 임명권과 총리가 추천한 장관들에 대한 임명권도 갖는다. 의회는 알바니아의 외교, 국내 정책에 대한 안을 논의하며, 정부 부처와 국가기관을 통제한다. 140명의 의회는 4년 임기로 국민들의 보통 선거로 선출된다. 사법 체계는 대륙법에 근본해 보통 민법, 사법 재판소와 행정 재판소로 나뉘어 있다. 경찰은 가장 큰 법 집행기관으로 범죄 수사, 순찰 활동, 교통 정리과 국경 관리 등을 포함한 모든 업무를 담당한다.

알바니아의 국군은 비 전시상황에는 총리와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신 행사한다. 군대는 작전 참모, 육군, 공군 그리고 해군으로 구성된다. 병역 제도는 19세 이상의 자원입대로 운영된다. 2009년 현재 병력이 14,500명이다.

서비스 부문이 경제의 대부분으로 산업과 농업 부문이 그 뒤를 잇는다. 경제 개혁으로 해외 투자를 개방했는데 에너지와 교통 인프라가 대표적이다. 석유, 가스는 알바니아에서 가장 유망한 산업이다. 원유와 천연 가스의 매장량이 중동보다 적지만 수요를 충족하고 여분을 수출한다. 그외 석유화학제품, 플라스틱, 질소비료, 과인산석회 등이 생산된다. 상당량의 광물 생산국으로 세계 최대 채굴량 크롬철광과 니켈 함유 철광석, 구리, 갈탄, 천연 아스팔트 등이 채굴된다. 서비스업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부문으로 대부분 관광업에서 나온다. 2014년 관광업은 GDP의 6%로 간접 부문까지 최대 20%이다. 관광은 아드리아 해와 이오니아 해 연안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인구의 41%가 농업에 종사하며, 국토의 24.3%가 경작지로 그 중 1/2에 곡물을 재배한다. 남동부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일찍 농사를 시작한 지역이고 또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 재배 역사를 지닌 국가 중 하나이다. 농경지 중 1/2 이상이 관개되며 올리브, 밀, 옥수수, 보리, 귀리, 콩류, 사탕무, 면화, 해바라기씨, 담배, 감자, 포도, 앵두 등이 재배된다. 육류, 벌꿀, 유제품, 전통 약재와 방향유 등도 생산한다. 주요 가축은 양, 염소, 소, 돼지 등이다. 인근 해안에서는 잉어, 송어, 감성돔, 홍합, 갑각류를 잡는다. 세계 가장 큰 수력 발전 생산국 중 하나로 전기의 대부분을 공급한다. 5대 수력 발전소 중 피에르자 등 4개가 알바니아 최장 긴 드린 강에 있다. 데볼 강 인근에 두개의 풍력 발전소가 있는데, 모기이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의 발전소다.

2018년 인구는 2,934,363명이며, 전체 인구의 59%가 도시에 거주한다. 인구 구성은 알바니아인 82.6%, 그리스인 0.9%, 마케도니아인 0.2%, 몬테네그로인0.01%, 아로마니아인0.3%, 롬인0.3%, 발칸 이집트인 0.1%, 기타 14.0% 등이다.

전체 인구의 98.8%가 모어로 공용어인 알바니아어를 사용한다. 소수 언어로 아로마니아어, 세르비아어, 마케도니아어, 보스니아어, 불가리아어, 고라 방언, 롬어 등이 있다. 알바니아인들은 이민과 식민지배의 역사 탓에 수개 국어에 능통하다. 해외 거주자의 귀환으로 영어,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가 쓰이는데, 특히 그리스어는 2번째로 많이 쓰인다.

2011년 58.7%가 이슬람교 신자, 17.0(동방정교회 6.7% 포함)%는 기독교 신자이며 24.3%가 무교이다. 동방 정교회 측은 24%가 동방 정교회 신자라 주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70%가 이슬람 신자, 20%는 동방 정교회 신자, 10%가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학제는 초등교육(8년), 중등교육(4년), 그리고 고등교육(4년)으로 의무교육 8년을 정부가 지원한다. 한 학년은 9~10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6~7월에 끝난다. 1957년 설립된 국립 티라나 대학교가 대표적인 대학교다.

많은 고속도로와 철도가 티라나와 두러스를 통과하여 북부와 남부, 서부와 동부를 연결한다. 철도는 국영 기업 알바니아 철도가 관리한다. 공산정부 붕괴 후 차 소유자와 버스 이용량이 크게 증가했다. 현재 티라나~리나스~두러스를 잇는 철도 노선이 2019년 개통된다. 아드리아 해 연안에 4개의 항구가 있는데, 최대 항구는 두러스 항이다. 티라나 국제공항은 알바니아 유일의 국제공항으로 유럽 도시를 연결한다. 정부는 북부의 쿠커스에 새로운 공항을 세울 계획이다.

관광지로 남쪽 고대 도시 부트린트, 베라트와 지로카스터르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됐다. 그외 셰베니크-야블라니체 국립공원, 두러스 원형 경기장, 셀체스 세 포슈메 왕릉, 오흐리드의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 고대 도시 아폴로니아 등이 잠정 목록에 등재됐다. 일리리아 고대 도시 빌리스, 아만티아, 포이니케 그리고 슈코더르 등도 있다. 비잔틴 양식의 교회, 성채, 수도원들도 있고, 오스만 제국의 기념 유적들도 있다. 19세기 중세 마을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들이 재건축하여 유럽 도시들과 비슷하다.

‘알바니아(Albania)’는 고대 그리스어 ‘Albania’가 중세 라틴어를 거쳐 최종 정착을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겸 천문학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서기 150년 지도제작 당시 듀러스 북동쪽의 도시 알바노폴리스를 명시할때 알바니(Albanët)의 일리리아 부족명을 ‘알바니안’으로 명기하면서 유래됐다고 추측한다. ‘알바니아’는 중세 아르바논 공국으로 지속되었으나 두 이름이 같은 장소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0세기 비잔티움 제국 역사가 마하일 아탈리아티스는 역사서에서 1043년 콘스탄티노폴에 대항한 사람들을 ‘Albanoi’라 처음 기술했고 디라키움 공작이 다스리는 사람들을 알바니타이(Arbanitai)라 기술했다. 중세 동안 알바니아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아르버리(Arbëri)’ 혹은 ‘아르버니(Arbëni)’라 불렀으며 자신들을 ‘아르베레쉐(Arbëreshë)’ 혹은 ‘아르베네쉐(Arbëneshë)’라 지칭했다. 오늘날 알바니아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슈치퍼리(Shqipëri)’ 혹은 ‘슈치퍼리아(Shqipëria)’라 부른다. 이 말들은 14세기부터 기록되어왔다. 17세기말~18세기초부터 지명 슈치퍼리아와 민족 지칭어 슈치파레(Shqiptarë)가 알바니아어 사용자들 사이에서 아르베리아(Arbëria)와 아르베레쉬(Arbëreshë)를 점차 대체했다. 두 단어는 "독수리들의 땅" 혹은 "독수리들의 아이들"로 종종 해석된다.

[김권제 칼럼니스트]
고려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김권제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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