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어느 영환들 나름의 계산이 없을까마는 ‘클로젯’(김광빈 감독)은 정말 치밀한 셈법을 적용해 장르적 재미를 최대한 부각하면서도 드라마와 교훈의 완성도에 집중하는 한편 유머에 소홀하지 않는다. 공포의 존재는 벽장 속에 자신의 이계를 창조한 민담 속의 요괴 어둑시니와 그를 따르는 요괴들이다.

건축 디자이너 상원(하정우)은 지난해 아내 승희와 딸 이나(허율)를 승용차에 태우고 이동하던 중 대형 트럭과의 충돌 사고로 아내를 잃은 뒤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나의 보호자 역할을 충분히 못했기에 이나 역시 그와 거리를 둔 채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외로움과 싸운다.

상원은 새로 이사한 집 2층 이나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올라가 보지만 이나는 아무 일 없다면서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고 예전과 다르게 환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괴이한 일들이 발생하더니 이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집에 퇴마사 경훈(김남길)이 찾아와 이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경훈은 지난 20년간 수십 명의 아이들이 사라졌고, 자신은 그들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을 데려간 범인은 어둑시니. 고려 때 민담으로 전해져 조선 때 자리 잡은 어둑시니는 사실 그렇게 강력하거나 살천한 요괴는 아니다. 인간의 눈과 마주치면 덩치가 커짐으로써 그를 압사시키는 게 전부다.

심지어 덩치가 커질 때 인간이 무시한 채 그의 발을 바라보면 덩치가 작아짐으로써 제압할 수도 있다. 어둑시니는 어둠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더불어 자만심을 뜻한다. 누구나 어둠과 심연을 두려워한다. 사실 그 어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상대방이 두려워할 때 그걸 먹고 허풍으로 덩치를 키운다.

감독은 그런 토속적 유머를 비장미로 바꾸는 영리함을 발휘했다. 벽장은 판타지와 공포를 동시에 지닌 장소다. 그 속에 담긴 각양각색의 의상들은 데이트나 파티와 연관되는가 하면 아이들에겐 숨바꼭질의 단골 은신처다. 그래서 서양의 판타지나 호러에서 종종 새로운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로 쓰인다.

경훈은 퇴마 굿을 하다 희생된 무녀의 아들이지만 무속인이 아닌 퇴마사의 길을 걷는다. 그가 악귀를 퇴치하는 방법은 다분히 무속적이지만 악귀를 찾는 수단은 비교적인 신물을 배제한 첨단 장비의 활용이다. 이렇듯 우리의 토속적 신비주의와 서양의 오컬트를,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적당히 버무렸다.

이런 호러적 장치들을 지탱하는 근간은 아동 학대라는 소재다. 이 영화에는 경제적인 지원만 해주면 할 일 다 했다는 상원과 경제적으로 해준 게 없고 앞으로도 희망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아버지가 나온다. 물론 그 두 부류의 중간엔 아동을 학대하거나 방치하거나 혹은 혹사하는 자도 은유하고 있다.

상원은 지난해 이나의 생일 때 한정판 인형을 사줬고 그 후로도 수시로 신제품을 사준다. 그런데 이나는 벽장 속에서 발견한 예전에 누군가 사용했던 헌 인형과 노는 게 더 즐겁다. 일이 바쁜 상원은 이나가 짐처럼 부담스러워 숙식이 제공되는 캠프에 보내려고 거액의 기부금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아버지는 IMF 시절에 크게 망해 빚만 지고 더 이상 희망이 안 보이자 극단적인 길에 가족들을 동반시킨다. 가장으로서 아내와 자식을 책임져야 하는 건 맞다. 그런데 그 책임은 오로지 살리는 데 있는 것이지 생사여탈권까지는 아니다. 아직도 뉴스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극단적 비극이다.

영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뚤어진 가족의 위계 질서부터 맹자의 성선설, 플라톤의 이데아, 그리고 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피타고라스-플라톤-기독교로 이어지는 사랑을 웅변한다. 집(가족)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또한 아직도 자식의 독립적인 인격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에 대해 따끔한 쓴소리를 던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내와 자식이 가장의 소유라는 이론을 펼쳤다. 그때(BC 4세기)엔 그럴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확실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려 2300년도 더 지났다. 반려동물을 죽여도 실형이 선고되는 시대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꿈꾸며 유토피아를 탐구했고, 맹자는 성선설을 외쳤다.

사람이 어둠에 공포를 느끼는 건 빛(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루시퍼가 원래 천사였듯 악마의 본류는 천사나 요정이라고 보는 교파도 있다(성선설). 어둑시니는 방치되고 소외됐기에 어둠 속에 내던져졌다. 끊임없이 깨우치고 사랑하며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만 어둠의 존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훈.

그러 메시지들은 결국 자신의 자식은 물론 모든 아이를 보호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대승적 차원의 훈계로 발전해 ‘악귀는 사람이 만들거나 사람에서 된다’는 테제로 나아간다. 애초에 신은 모든 생명을 선하게 창조했다. 하지만 신이 바빠 돌보지 못하고 악마가 바빠 벌하지 못하자 인간이 악해졌다.

상원이 “어른들이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뉘우치자 국면은 가파르게 변해간다. 신, 귀신, 악마, 악령, 천사 등은 존재할까? 과학은 논제 자체를 거부하지만 종교와 신비주의는 더 많은 걸 만들어내고 철학은 조심스레 사유한다. 플라톤은 실재와 현상을 구별하면서도 침대를 통해 세계를 모사로 봤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옳다면 신은 존재한다. 불교는 모두에게 부처의 가능성을 열어 놨다. 어둑시니가 이나에게 찾아온 건 상원이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 “일을 핑계로 자식에게 소홀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집에 가고 싶다”는 이나의 대사가 주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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