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김원봉]

▲ 영화 <암살> 스틸 이미지

고향에 들르다

김원봉은 1946년 2월 하순 꿈에 그리던 고향을 찾아 마을 주민들과 만나 기쁨을 나누었고 부산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47년 3월22일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주도로 24시간 총파업이 단행됐는데 이때 미군정과 우익 청념단체들은 김원봉이 참여하고 있는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과 그 산하단체들을 일제 습격했다. 이때 일제 때 악질 경찰관 노덕술에게 붙잡혀 뺨을 맞는 수모를 당했다.

1948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 되고 신변에 위협이 가중되자 그해 4월 9일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었다. 월북에는 가족 외에 인민공화당 간부 여러 명이 동행했다. 이에 앞선 3월 25일 북조선민주주의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조선의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해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열자고 방송을 통해 제안해왔다. 이틀 뒤에는 김일성과 김두봉이 연서로 김구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러면서 남측 참가자로 김구, 김규식, 홍명희, 김일청, 박헌영, 김원봉 등 15명을 거명했다.

김원봉이 월북하게 된 동기는 신변의 위협, 정치상화의 변화, 민전 산하단체에 대한 폐쇄, 그리고 북한에는 예전 동지들인 연안파 인물들이 정치적 기반을 잡고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북한에 눌러 앉은 그는 군사행정을 전문으로 하는 국가검열상에 이어 김일성, 김두봉, 허헌 등과 함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북한에서의 기록은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2기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끝으로 이름이 사라졌다.

밀양시 영남루. 아침에 만나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강가에는 노을이 지고 하늘에는 붉게 물든 구름이 바람에 의지한 채 흘러간다. 민족독립을 위해 한 평생 보냈던, 이제 와서 우리 곁에서 활약상을 새삼 보여주는 사나이의 인생을 잠시나마 들여다보면서 김원봉과 부인 박차정이 주고받으며 사랑과 혁명을 꿈꾸었던 헝가리 민족시인 페퇴피 산도르의 시 한 구절을 회상해본다.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 김원봉 : (사진 출처-김문 작가: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1898년 8월 경남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 출생.
1905년 서당입학.
1910년 밀양 사립 동화학교 입학 및 중퇴.
1916년 서울 중앙학교 입학 및 중퇴.
1917년 10월 중국 천진 덕화학당 입학 및 귀국.
1918년 9월 중국 남경 금릉대학 입학.
1919년 6월 신흥무관학교 입학, 9월 퇴교, 11월 길림에서 의열단 창단.
1920년 5월 안창호 면담, 9월 의열단원 박재혁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1922년 3월 의열단원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일본군 대장 다나카 저격(상하이).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 작성, 6월 의열단 총회 개최.
1924년 1월 의열단원 김지섭 동경 이중교에 투탄.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 제4기 입학, 12월 의열단원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1927년 4월 한국혁명청년회 2차 임시대회 개최, 광주 탈출, 상하이 거쳐 무한으로 감.
1928년 3월 의열단 3차 대회 개최(상하이).
1929년 의열단 본부를 상하이에서 북경으로 옮김.
1930년 4월 레닌주의정치학교 개교, 의열단원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만주지부 결성.
1931년 2월 레닌주의정치학교 제2기 졸업, 6월 의열단원들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 선지부 설치.
1932년 봄 의열단원 남경으로 이동, 10월 남경교외에 혁명간부학교 개교.
1933년 4월 군관학교 1기생 졸업, 7월 혁명간부학교 졸업생들 국내와 만주 등 공작지에 파견.
1934년 4월 김구 혁명간부학교 방문.
1936년 1월 민족혁명당 기관지 ‘민족혁명’ 창간호 발간, 7월 민혁당 남경조선부녀회 결성(책 임자 박차정).
1937년 12월 민혁당, 해방동맹, 혁명자연맹 한구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창립 총대장.
1941년 연초 조선의용대 각 지대 낙양으로 이동. 4월 조선의용대 황하 건너 화북에 진입.5 월 민혁당 임정 참여 선언.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광복군 제1지구대로 편입. 12월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으로 취임.
1943년 10월 부인 박차정 사망.
1944년 5월 임정군부장에 취임.
1945년 1월 최동선과 재혼, 9월 조선인민공화국 군사부장으로 추대.
1947년 3월 군정경찰에 피검. 4월 무혐의 석방. 7월 김규식, 여운형, 허헌과 함께 4거두 회 담, 서재필과 면담.
1948년 4월 민전대표로 월북, 9월 북한정부의 국가검열상에 취임.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
195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해임, 11월 숙청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약산 김원봉(이원규, 2005, 실천문학사), 경성의 사람들(김동진, 2010, 서해문집),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1997, 창작과 비평사), 양산과 의열단(박태원, 2000,깊은샘), 약산 김원봉 평전(김삼웅, 2008, 시대의창)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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