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작품성과 재미를 동시에 갖추고 ‘기생충’, ‘조조 래빗’ 등과 경쟁 중인 영화 ‘1917’(샘 멘데스 감독)은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7년 4월 6일 시작된다. 프랑스 북부 도버해협 인근 지역. 독일군에 의해 통신망이 끊긴 상황에서 영국군 일병 블레이크가 호출을 받는다.

파트너로 친구 스코필드 일병을 데리고 갔더니 에린 무어(콜린 퍼스) 장군이 최전선 크루아지유에 있는 2대대장 매켄지(베네딕트 컴버배치) 중령에게 공격 중지 명령서를 전하라고 한다. 독일군은 가짜로 퇴각한 뒤 배수진을 쳤는데 이를 모르는 매켄지가 내일 새벽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할 예정.

두 사람이 살려야 할 대대원 1600명 중에는 블레이크의 형도 있다. 장군은 인근의 독일군이 퇴각했다고 주장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치 중이었기에 목숨을 담보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아군이 진을 친 기나긴 참호를 지나 중립지를 거쳐 독일군 진지에 이르자 긴장한 채 착검을 한다.

독일군의 참호에 다다르자 인기척이 없다. 불을 피우던 드럼통을 확인하니 불씨가 아직 남아있다. 퇴각한 지 얼마 안 된다는 증거. 진지 내 임시 숙소를 확인하던 중 부비트랩을 발견하는데 상상 이상으로 큰 시궁쥐가 케이블을 건드리는 바람에 폭발이 일어나 스코필드가 폭발 잔해물에 깔리는데.

군인들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게 훈장이다. 블레이크는 흙과 벽돌더미에 깔려 기절한 스코필드를 신속한 동작으로 구해낸다. 다시 숨을 쉬게 된 스코필드는 “훈장 받겠네”라고 축하하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런데 스코필드는 이미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 그걸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거짓말이다.

그는 프랑스군 대위의 와인과 바꿨다고 고백하고 블레이크는 왜 그랬냐며 안타까워한다. 스코필드는 “그깟 쇠 쪼가리가 뭐 대수인데”라고 반응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개념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결, 혹은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의 충돌이다. 멘데스 감독은 거장의 반열에 우뚝 올라섰다.

“밥은 안 굶길 듯해서 사제를 포기하고 군대에 왔더니 배고파 죽겠네”라는 푸념, 임무를 수행하던 중 죽을 뻔한 스코필드의 “왜 하필 나야?”라는 블레이크가 자신을 파트너로 지목한 데 대한 원망, “가벼운 임무인 줄 알았는데”라는 핑계, “철수했는데 수류탄을 줘?”라는 불신 등은 유물론의 은유다.

독일군이 전략적으로 퇴각했다고 믿는 수뇌부, 그걸 의심하는 두 주인공, 사령부와 달리 승리가 눈앞에 있다며 일대 결전을 준비 중인 2대대 등 역시 유물론과 관념론의 충돌이다. 프랑스의 독일군 주둔지역을 통과하던 스코필드는 은신하려 건물 지하에 들어갔다 프랑스 여인과 갓난아이를 만난다.

그는 “딸이네요. 이름은 뭐죠?”라고 묻고 여자는 “몰라요”라고 답한다. 다시 “아이 엄마는?”이라고 묻자 “몰라요”라는 답이 되돌아온다. 이 작품의 뼈대는 ‘자신만만’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다. 그가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통해 생존의 의지는 곧 생식의 의지라고 주장한 내용과 일치한다.

전쟁 중에도 인류의 생식, 즉 종족의 보존은 계속돼야 미래가 있다는 메시지다.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아이는 인류의 미래다. 서로 죽이는 참혹한 전쟁 중의 휴머니즘! 스코필드는 정말 무모할 정도로 임무에 집착한다. 스나이퍼를 제거하고, 적진 한가운데를 지나 드디어 최전선에서 냅다 달린다.

이런 무모한 행위들은 책임감에 대한 의지다. 그는 ‘이 세계는 진정한 실재가 아니라 단순한 주관적 표상이고 이 세계의 배후에서 그것을 성립시키는 실재는 살려고 하는 맹목적 의지’라는 쇼펜하우어를 믿는 것이다. 그는 임무를 시작하자마자 철조망에 손을 다친다. 왜 자신을 뽑았냐는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의지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인간의 정신과 지성의 근원은 자기 생존의 욕구라고 주장했다. 즉 그는 감각을 무시하고 이성적 직관으로 진실을 찾는 존재론을 펼쳤다. 그러니 생존보다는 죽을 확률인 높은 임무에 제일 친한 자신을 끌어들인 블레이크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넘고 또 넘음으로써 블레이크의 형을, 1600명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게 된다. 제 총도 잃은 채 총탄이 난무하는 독일군의 영역을 관통하는 무모한 도전은 ‘삶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는 한 인생은 고통’이라던 쇼펜하우어다. 유물론 대신 관념론의 손을 들어준다.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감독은 블록버스터 ‘007 스카이폴’과 ‘007 스펙터’를 거친 후 ‘1917’로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갖춘 확실한 보증수표가 됐다. 롱 테이크와 원 컨티뉴어스 숏을 적절히 섞은 촬영기법은 전장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현사실적이다.

그가 빛의 마술사라는 건 세상이 아는 사실. 자연광을 이용한 낮의 시퀀스도 좋지만 조명을 교묘하게 활용한 밤의 시퀀스는 정말 숨이 멎을 만큼 환상적이다. 세계대전을 두 번씩이나 일으킨 독일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일촉즉발의 순간에 약간은 유머러스하게 펼쳐지지만 그 교훈만큼은 꽤 진지하다.

천신만고 끝에 만난 2대대. 한 병사가 홀로 서 재즈 혹은 에밀루 해리스의 팝으로 널리 알려진 민요 ‘Wayfairing stranger’를 부르는 시퀀스는 마치 진공상태에 빠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장엄하다. “희망은 위험하다”는 중령의 말은 “인생은 고통, 세계는 최악”이라던 쇼펜하우어다. 1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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