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문신을 한 신부님’(얀 코마사 감독)의 원제는 ‘그리스도의 성체’지만 왠지 한국 제목이 전체적 내용과 더 잘 어울린다. 소년원에서 복역 중인 다니엘(바르토시 비엘레니아)은 토마시 신부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며 신부를 꿈꾸지만 토마시는 전과자는 신부가 될 수 없다고 절망적인 말을 한다.

그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보누스가 입소하는 때에 맞춰 토마시가 소개한 목공소에서 착실하게 근무하는 조건으로 가석방된다. 그러나 다니엘은 목공소를 지나쳐 마을의 교회로 들어가 엘리자를 만난다. 그녀가 자신이 신부라는 말을 안 믿자 훔친 사제복을 보여주고, 그녀는 엄마 리디아를 소개해준다.

리디아는 주임 신부의 측근에서 교회 일을 도와주고 있다. 다니엘은 리디아를 통해 주임 신부와 친분을 맺고 마침 병세가 악화된 주임 신부는 며칠만 자신을 대신해 임무를 수행해달라고 부탁한다. 얼떨결에 마을 사람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고 미사와 추도 행사 등을 주도하면서 신부처럼 변해간다.

그는 교회 인근에서 망자들의 사진이 붙은 추모 게시판을 발견한다. 지난해 엘리자의 오빠 쿠바를 포함한 젊은이 6명이 탄 승용차와 중년의 스와베크가 탄 차가 충돌해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게시판에 스와베크의 사진만 없는 걸 이상하게 여긴 다니엘은 그의 미망인 에바를 찾아가는데.

기독교도라면 당연히 보고 싶을 만하겠지만 결코 종교를 강요하거나 고루한 설교를 하는 영화가 아니다. 아이러니컬한 제목과 달리 내용은 매우 진중하고, 메시지는 묵직하다. 다니엘이 신부가 되려는 이유는 종교적 깨달음을 얻은 것도, 신분세탁을 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냥 무의식적, 운명적이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이분법에 대한 비판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다. 다니엘은 출소 후 마약, 술, 담배, 섹스, 힙합에 절고 토마시 신부의 배려도 무시한다. 처음 본 엘리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싶거나 혹은 과시하고 싶어 사제복을 보여준 뒤 거짓의 늪으로 빠지지만 정직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과연 성과 속, 선과 악의 경계는 무엇인가? 확실한 구분이 있기는 할까? 악은 선과 대척점에 서고, 악한 자는 이교도인가? 다니엘은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전과자이지만 본의 아니게 신부 노릇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잣대로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고, 그들의 호응을 이끌어낸다.

한 중년 여인이 “제 12살 막내아들이 담배를 피우고, 저는 그를 때립니다. 아들을 말릴 길은 뭔가요? 체벌한 저는 어떻게 회개해야 할까요?”라고 고해성사를 한다. 다니엘은 “교우께서 피우시는 담배나 더 독한 담배를 주시고, 체벌은 아들에게 자전거를 태워주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첫 미사 때의 첫 마디가 “침묵도 기도”다. 또 “내 인생조차 벅찬데 어찌 예수 흉내를 낼까?”라고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린다. 그는 현대판 칼뱅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이끌면서도 부와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기득권 세력이 엄연히 존재했던 교계의 폐단을 꾸짖는다.

시장과 주임 신부는 결탁해 마을 사람들을 집단 최면 상태에 빠뜨렸다. 사건의 진실은 은폐, 엄폐됐고 유족들의 고통은 집단 히스테리로 분출돼 기득권의 세력 유지와 수입의 자양분이 된다. 이를 위한 최고의 프로파간다는 ‘주님의 계획’. 현재의 고통은 미래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예정조화라는.

다니엘은 추모 게시판 앞에서 “하느님, 분노가 솟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판단하시기 전에 제발 먼저 이해부터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울부짖으며 유족들에게 감정을 속이지 말라고 부추긴다. 그리고 그는 게시판으로 함께 팔을 뻗는 의식을 주도하는 시스마 같은 행위를 펼친다.

그는 다분히 중세의 유명론 스콜라 철학자 오컴(의 윌리엄)을 닮았다. 미사 때 성수를 마구 뿌리는 퍼포먼스로 신도들의 환호를 이끌어낸 뒤 탈의실로 온 그에게 리디아는 그냥 두면 썩으니 펼쳐 말리게 달라고 한다. 그러자 그는 “성수인데(썩는다고?)”라고 대꾸한다. 절정의 시퀀스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고해성사 같은 “저는 살인자입니다. 제가 죽였습니다. 머릿속으로 죽였고 실제 죽이려는 척했으며 실행에 옮겼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제일 잘하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을 포기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입니다”라는 설교는 상투적이고 형식적이며 점잔을 빼는 기득권 세력과는 확연히 달라 통렬하다.

“잊었다고 용서한 게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아닌 듯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용서는 사랑입니다. 죄를 졌더라도 그 죄가 무엇이든 사랑해야 합니다”라는 설파가 영화의 주제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다니는 그에게 시장이 협박을 하자 “당신에게 힘이 있더라도 옳은 건 나”라고 당당히 맞서는 것까지.

다니엘은 “우리가 어디서 왔든지 어디로 가는 게 중요하다”고 엘리자에게 말한다. 가문, 직업, 재산, 지위, 전과 여부 등 고정 관념 혹은 편견을 떨치지 못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세계, 그 잣대로 미리 한 사람의 행복과 활약의 범주가 정해져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주먹 감자다.

과연 신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타인을 증오하고 단죄할 자격은 있는지,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 영화는 “우린 죄를 시인하기까지 오래 걸린다”라고 언명한다. 종교도 사람이 만들었다. 기왕이면 변화에 따르고 트렌드도 반영하자는 결론은 엑스터시다. 13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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