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나의 소원

그렇다면 왜 일지(日誌)가 아닌 일지(逸志)라고 했을까. 그것은 그날 그날의 기록인 일기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상권을 쓸 때 김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었고 하여 고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보내는 유서형식으로 글을 썼다. 하권은 정신과 기력이 더 쇠잔하기 전 독립운동을 하면서 걸어온 소회의 글을 썼다. 말미에 붙인 ‘나의 소원’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백범일지’를 굳이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내용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혁명가의 면모와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도록 담아낸 것이 바로 ‘백범일지’이다.

네 소원(所願)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大韓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自主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도진순 창원대교수가 주해한 ‘백범일지’의 앞 부분에 보면 백범이 생을 마치는 1949년에 즐겨 쓴 시를 언급하고 있다.

영욕에 초연하여 그윽이 뜰 앞을 보니
꽃은 피었다 지고
가고 머무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가 바라보니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는구나
맑은 창공 밝은 달 아래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도
불나비는 유독 촛불만 쫓는다
맑은 물 푸른 숲에 먹을 것 가득하건만
수리는 유난히도 썩은 쥐를 즐긴다.
아! 세상에 불나비와 수리 아닌 자
그 얼마나 될 것인고?

불나비와 같이 덧없는 영화를 쫓겨나 수리와 같이 눈앞의 이익만을 탐하는 무리를 질타하는 내용이라고 도 교수는 풀이한다.

눈발이 내리는 2월 오후 효창공원 의자에서 잠시 백범을 알현했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았으므로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백범기념관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모자를 눌러쓴 노년의 신사도 보였고 어머니와 함께 손을 잡고 온 아이들도 보였다. 저들은 백범에 대해 얼마나 알까. 하기사 기자 역시 백범을 처음 접한 것은 교과서를 통해서였고 독립운동사를 조금씩 들여다보면서 알게 됐으니 피차일반일 것이다. 아, 2017년에 개봉된 영화 ‘대장 김창수’도 있겠다. 명성황후가 일본의 칼잡이들에게 살해 된 지 5개월 후 1896년 3월 일본인들과 다투다가 살해한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어난 사건부터 1898년 3월 김창수가 동료죄수들과 탈옥할 때까지 2년간의 시간을 다룬 영화다. 김창수는 원래는 김창암이었다가 18세때 동학운동에 뛰어들면서 김창수로 바꾸고, 이후 김구(金龜)에서 김구(金九)로 한자개명을 한 백범이다.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선생님 혹시 박기서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글쎄요, 생각이 잘 안나네요.”

“그렇다면 안두희는 아시겠지요.”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아마 육군 소위로 내가 경교장에 있을 때 불쑥 찾아와 권총을 꺼내 나를 겨냥했어요.”

-그 안두희를 ‘정의봉’이라는 몽둥이로 때려 죽인 사람이 바로 박기서라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좀더 자세히 얘기해보시오.”

“그러니까 1996년 10월입니다. 버스기사로 일하고 있는 박씨는 이날 오전 시장에서 산 길이 40㎝ 정도의 나무 몽둥이에 ‘정의봉’이라고 쓴 뒤 안 씨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를 정의봉으로 때려 죽였지요. 평소 김구 선생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박씨는 곧바로 경찰에 자수한 뒤 ‘이 하늘 아래에서 (안씨와)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면서 ‘너무나 분개한 나머지 범행했다.’고 동기를 밝혔습니다.”

“성격이 대쪽 같은 분이시네요. 그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이 사건으로 박기서 씨는 대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 3·1절 특사로 수감 1년 5개월 만에 출소했습니다. 안두희가 총을 겨누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시지요.

“그러니까 1949년 6월 26일입니다. 서대문에 있는 경교장 2층에서 ‘중국시선’을 읽고 있섰습니다. 이날 주일 예배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차가 없어서 교회에 가지 못하고 책을 읽었지요. 무료할 때는 책을 읽거나 붓글씨를 쓰곤 합니다. 오전 11시쯤 됐을까요. 포병 소위 안두희가 뵙기를 요청했습니다. 비서 선우진이 2층으로 안내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안두희를 만나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다짜고짜 총을 꺼내더군요. 총소리가 네 번인 것까지 듣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후로 나는 딴 세상으로 갔지요. 중국에 있을 때도 총에 맞은 적이 있지만 그때는 깨어났어요.”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부덕민, 『백절불국의 김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2009)
·김삼운, 『백범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04)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18 개정판)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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