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빈한한 상놈의 아들로 태어나

-얘기를 어린 시절로 돌리겠습니다. 태어난 곳의 환경은 어떠했습니까.

“그러니까 1876년 7월 11일 새벽에 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4형제 중 둘째로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제대로 못가고 24살 때 삼각혼에 의해 장연에 사는 현풍 곽씨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삼각혼이란 세 성(姓)이 혼기에 이른 자녀를 서로 교환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세 집안이 딸을 바꾸는 것이지요. 즉 갑은 을에게, 을은 병에게, 병은 갑에게 딸을 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며 주로 하층사회의 혼인 풍습이었습니다. 그렇게 결혼한 어머니는 나를 낳을 때 유례없는 난산을 겪었습니다. 산통이 시작된 지 6~7일이 되어도 태어나지 않았고 어머니의 생명은 위험해졌습니다. 친척들이 모여 온갖 의술치료와 미신처방을 다했지만 효력이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집안 어른들이 아버지한테 소갈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 소울음 소리를 내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이때 어머니 나이가 17살입니다. 젖도 잘 안 나와 아버지가 나를 안고 이웃집 산모에게 가서 젖을 먹이곤 했습니다. 나는 서너 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어머니께서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나무침으로 따고 고름을 파내어서 내 얼굴에 마마자국이 어른이 되어서도 많았습니다.”

-집안 내력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이 자손입니다. 경순왕의 8대손이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의 21대손입니다. 우리 조상은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우리 선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어 11대조가 되시는 어른이 도망하여 백운방 텃골에 숨을 자리를 구하게 됐죠.”

-어렵게 성장했다고 볼 수 있네요.

“집안 환경이 그러하니 어쩔 수가 없었죠. 한마디로 상놈의 집안이 아닙니까. 서당에 가고 싶었지만 동네에는 없었고 다른 동네 양반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아주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자제들한테 멸시를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 꼴은 못 보겠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배우는 과정도 힘들었겠네요.

“결국 아버지께서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습니다. 수강료는 쌀과 보리를 가을에 모아주기로 하고 청수리(淸水里) 이생원을 선생으로 모셔왔습니다. 선생이 오시던 날 나는 너무 좋아서 머리 빗고 새옷을 입고 마중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랑에 공부방을 열었습니다. 이때 내 나이 열두 살이었습니다. 수업 첫날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이라는 다섯 글자를 배웠는데 뜻을 알 뜻 모를 뜻 너무 기뻐서 밤에 어머님의 밀 매갈이를 도와드리며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나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누구보다도 먼저 선생 방에 가서 글을 배우고 밥구럭을 메고 멀리서 오는 동무들을 내가 가르쳐주었습니다. 동무들 중에 수준이 나보다 높은 이도 있었지만 배운 것을 외우는 것은 늘 내가 최우등이었습니다. 선생은 반년 후 떠났고 우리 동네에서 10리정도 떨어진 서당에서 ‘한시’와 ‘당시’, ‘대학’과 ‘통감’ 등을 배웠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부덕민, 『백절불국의 김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2009)
·김삼운, 『백범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04)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18 개정판)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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