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남들보다 글을 열심히 배운 것은 신분상승을 위해서인가요.

“워낙 우리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다 상놈의 신분이어서 집안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신분상의 얘기가 되었지요. 그래서 1892년 나이 17살 때 해주에서 임진경과(壬辰慶科)를 실시한다는 과문(科文)이 나붙었습니다. 마지막 실시되는 과거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자 아버지 이름으로 과거시험을 봤는데 낙방했습니다. 이때 이상한 말들이 나돌았습니다. ‘답안지를 시관(詩官)에게 보이지도 않고 답안지 한 아름을 도적하여 갔다.’는 것이나 ‘과거장에서 글을 짓고 쓸 때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하는데 글을 모르는 자가 그걸 보고 자기의 글로 제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괴이한 말은 ‘돈만 많으면 과거도 벼슬도 다 할 수 있다. 글을 모르는 부자들이 큰 선비의 글을 몇 백녕 몇 천냥씩 주고 사서 지신도 하고 급제도 한다.’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이번 시관은 누구이니 서울에 아무 대신에게 편지를 부쳤으니 반드시 된다.’는 말이 돌아다녔습니다. 나는 과거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으며, 심혈을 기울여 선비가 되는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결과는 뻔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좌절하면서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아버지는 ‘관상이나 풍수를 배워보거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고, 관상을 잘 보면 성인군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공교롭게도 그 무렵 이승만과 같이 과거에 낙방이 됐습니다. 떨어진 후 이승만은 ‘영어와 미국 학문의 길’로 들어섰고 백범은 ‘관상과 풍수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아마 두 분 다 합격했다면 국가의 녹을 받아먹는 관리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관상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달마대사가 지었다는 ‘마의상서’(麻衣相書) 한 권을 이버지가 빌려주셔서 독방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관상서를 공부하는 방법은 먼저 거울로 자신의 상(相)을 보면서 부위와 개념을 익힌 다음 다른 사람의 상으로 확대, 적용해나가는 것이 첩경입니다. 나는 석달동안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貴格). 부격(富格)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賤格), 빈격(貧格), 흉격(凶格)밖에 없었습니다. 과거시험에서 낙방할 때보다 더 비관에 빠졌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상서’ 중 ‘상 좋은 것은 몸에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구절을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상 좋은 사람(好相人)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어떤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외적 수양보다는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마음을 먹었습니다. 종전에 공부 잘 하여 과거를 통해 벼슬하여 천한 신세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요,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서’를 덮은 뒤에는 지리에 관한 책을 좀 보았으나 취미를 얻지 못하고 병서(兵書)인 ‘손무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열심히 보게 됐습니다. 훌륭한 장수가 될 자질을 논하면서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지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흥미있게 낭송했습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1년 넘게 훈장질하면서 의미도 잘 모르는 병서만 계속 읽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부덕민, 『백절불국의 김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2009)
·김삼운, 『백범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04)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18 개정판)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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