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이장’(정승오 감독)은 코로나19 탓에 개봉이 연기됐지만 언론, 배급 시사회 후의 호평과 각종 영화제에서의 수상 소식을 통해 관객들의 관심과 기대를 부풀리고 있다. 무엇이 이 영화에 주목하게 만들까? 우리 생활 깊숙이 뿌리내려 있지만 겉으론 개선됐다고, 혹은 그냥 전통이라고 우겼던 남녀 차별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계사회가 있었다. 아마조네스의 산화는 아예 남성의 인격을 지우고 그저 종족보존을 위해 도구화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사회적 동물이고 욕심이 끝이 없는 인간의 속성상 집단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전투력이 우월한 남자가 리더로 바뀌는 부계사회와 혼인제도가 자리 잡게 됐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독립한 5남매. 혜영은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이고, 돈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금옥은 남편의 외도로 속을 앓고 있다. 금희는 날을 잡은 결혼을 고민하고, 혜연은 대학에서 투쟁 중이다. 이들은 연락이 두절된 막내아들 승락 없이 아버지 묘 이장 문제로 호출한 큰아버지 관택의 집에 간다.

그러나 관택은 장남 없이 어떻게 이장을 하냐며 빨리 찾아오라고 내쫓는다. 이렇게 시작된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오래된 관습을 해체하고 비판한다. 남매 중 제일 어린 승락은 어느새 관택의 노선에 동참하고, 네 자매는 관택의 고지식에 대항해 매우 보편적인 현실을 주장한다.

플라톤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야말로 중용의 교주였다. 독일은 플라톤을, 영국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각각 존경했다. 플라톤은 남편, 아내, 자식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세계를 꿈꿨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내와 자식도 노예처럼 아버지의 소유라고 더듬더듬한 말투로 외쳤다.

여기서 보듯 성차별은 비단 우리 민족만의 병폐는 아니었다. 다만 우리네 풍습 중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악습이 아직까지 ‘어른’들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게 문제다. 관택은 아내 옥남의 사소한 질문에조차 답하지 않는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남편이다. ‘여자들이 뭘 알아?’라는 게 그 이유다.

이는 나이 좀 먹었다는 사람들이 으레 젊은이들에게 ‘어린 것들이 뭘 알아?’라고 무시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한때 우리에게는 남자는 결혼을 해야만 성인이 된다는 의식이 팽배했었다. 목적론적으로는 이해는 되지만 그게 도그마일 때는 폐단이 되는 것이니 현대사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독사(억견)다.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대상화와 관혼상제에 잔존한 남존여비 악습은 시대착오적이고 그래서 인권유린 문제가 심각하다. 버닝썬 사태 등을 보면 여성을 성 노리개로 여기는 인도를 손가락질할 수만도 없다. 관택의 ‘살림만 하는 여자가’라는 말에는 여자의 기능성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짙다.

남자는 밖에서 힘들게 돈을 벌고, 여자는 집에서 편하게 밥이나 짓는다는 이 이분법은 남자들의 아전인수일 따름이다. 이렇듯 이 작품에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충돌이 유난히 두드러진다. 보수적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현실적인 사상가였지만 여자에 대한 남자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관념론자인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란 낙관론을 펼치긴 했어도 남녀평등을 외친, 당시에 보기 드문 페미니스트였다.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 언론은 언제부턴가 남녀 차등을 없애겠다며 남자든 여자든 ‘그’로 적고 있지만 서양은 많은 명사에서 남녀의 성을 구분한다.

다른 건 인정해야 한다. 다만 다르기 때문에 고유하고, 그 다른 개성과 특성이 또 다른 능력을 낳는다는 것에 주목할 줄 알고 잘 활용할 줄 아는 게 핵심이다. 혜영은 아들에게 아버지가 돈 벌러 미국에 갔으니 몇 년 뒤엔 돌아온다고 거짓말을 했고, 아들은 어렴풋이 거짓말이라는 걸 감지한다.

또 혜영은 육아문제로 회사 일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육아휴직 뒤 퇴사 처리를 거의 통보받은 상태. 여자를 차별하는 건 씨족사회 내에만 편재된 게 아니라 이 사회 전체에 전반적으로 산재해있다는 고발이다. 혜영은 ‘아빠 없는 자식’이란 편견으로 아들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운 것이다.

금옥은 지나치게 배금주의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지만 남편의 외도를 참아내고 있다는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그는 자매 중 유일하게 비대하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어차피 자신에게 사랑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단념한 채 현실적인 차원에서 계산기를 두들기다 보니 그렇게 됐다.

금희는 오래 사귄 연인과 곧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이 남자 참으로 철이 없는 데다 무능력한 마마보이다. 남매 중 가장 침착하거나 현명해 보이던 그녀는 고작 500만 원에 불과한 이장 보상금 때문에 남매들과 갈등할 정도로 천박해진다. 시부모를 두려워하는 며느리의 여자라는 원죄의식 때문이다.

혜연은 졸업도 미뤄가며 적극적으로 정의구현운동에 앞장서지만 대학에 붙인 자신의 대자보에서 ‘한국 여자도 한남의 딸일 따름’이란 남자들의 낙서를 봐야 하는 절망감을 경험해야 한다. 젊은 남자들마저도 어느새 ‘꼰대’들을 전승한다. 가족의 희망이었던 승락은 그러나 패배주의자로 전락한 상태다.

세상의 모든 사상가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념을 외쳤지만 방법론이 달랐을 뿐 행복이란 목적론은 유사했다. 종교가 권력자가 자신을 합리화,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면 영혼불멸 이념은 그 저의에 부합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의 유일한 비상구였기에 정착하게 됐다.

그리고 거기에서 장례문화와 제사문화가 형성됐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주목받는 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유전론 때문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따르면 언젠가 지구가 폭발하거나 그 전에 인류는 멸절할 것이다. 그러니 탄력적이고 사회합의적인 자세로 변화에 발을 맞추는 게 행복에 근접하는 길이 아닐까?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