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백범 김구] 그러던 백범은 18살 때인 1893년 2월 11일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로 기일원론(氣一元論)과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2대 교주인 최시형이 교단과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1894년 농민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조선은 사회적 혼란과 위기가 지속됐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지방관과 토호의 횡포와 착취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농민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예언서가 널리 유포됐다.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동학에 입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에 낙방하고 아이들을 모아 훈도를 하고 있을 때 사회의 구조 모순과 현실모순에 대하여 개혁을 제창한 동학이 해주 지방에 전도되고 있었습니다. 나 역시 그에 이끌려 우리 동네에서 20리 떨어진 포동(浦洞)에 사는 오응선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했습니다. 동학에 대해 첫째 하느님을 모시고 도(道)를 행한다. 둘째 존비귀천을 없앤다. 셋째 조선왕국을 끝내고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혁명논리에 전적으로 동감했지요. 인본주의(人本主義)를 기반으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하여 사회의 변화를 갈망했던 민중의 호응을 얻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호기심도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동학공부를 하는데 오응선 옆 동네에 사는 최유현 등은 방문을 열고 닫음이 없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며 공중으로 걸어다닌다고 했습니다. 최도명은 하룻밤 사이에 능히 충청도를 왔다갔다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새로운 삶을 뜻하는 의미에서 창암을 창수로 개명했습니다.”

-동학 입도는 어떻게 합니까.

“오응선을 만나 입도 절차를 물었더니 백미(白米) 한 말, 백지(白紙) 세 묶음, 누런 초(黃爥) 한 쌍을 가져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하시고 예물을 준비해주셨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습니다. 당시 양반들은 가입하는 자가 드믈었고 나와 같은 상놈들이 많이 몰렸습니다. 나의 연비(連臂)가 수백명에 이르렀습니다. 연비는 내가 포교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무렵에 나에 대한 근거없는 얘기가 퍼졌습니다. 예를 들어 김창수가 한 길 이상 공중에서 걸어가는 보았다는 것인데 황해도 물론이고 팡안남북도에까지 퍼져 연비가 수천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아기접주’라고 불렸습니다. 그래서 황해도 접주 15명이 교주 최시형이 머무는 충청도 보은으로 가서 ‘팔봉접주’라는 정식 접주 첩지를 받았습니다.”

-이후 활동은 어떻게 됩니까.

“고향인 해주로 돌아온 것은 1894년 9월경입니다. 이 무렵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전쟁이 삼남으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황해도에도 양반과 관리들의 압박이 있었고 삼남에서 동학군에 호응하라는 연락이 잇따라 왔습니다. 우리 15명의 접주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거사를 하기로 하고 해주 죽천장을 총소집의 장소로 정하고 각처 도인들에게 이 뜻을 알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성을 먼저 함락하고 탐관오리와 왜놈들을 다 잡아 죽이기로 결정하고 팔봉접주인 나를 선봉으로 임명했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평소 병법을 연구했고 또한 나의 접이 산포수로 잘 무장되어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면에는 자신들이 총알받이가 되기 싫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출동했겠군요.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고 나 역시 그렇게 하려고 다짐을 했던 처였습니다. 즉시 출동하여 전군을 후방에 따르도록 하고 나는 선두서 말을 타고 선봉(先鋒)이라는 사령기를 잡고 해주성으로 달려갔습니다. 해주성 서문 밖 선녀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지요. 총사령부에게 나의 계획을 전달했습니다. 선발대가 남문을로 진공하면 내 지휘하의 선봉부대는 최대 속력으로 서문을 공격하여 함락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총사령부는 정황을 보고 아군의 허약한 곳을 응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작전을 개시할 무렵 왜병들이 성 위에 올라가 공포 네댓방을 쏘아댔습니다. 그러자 남문으로 향하던 선발대는 이 총소리에 놀라 도주하기 시작했고 왜병은 남문 밖으로 나와 도주하는 군중을 향해 연발로 총을 쏘아댔습니다.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선봉대를 이끌고 서문에 도착하여 맹렬하게 공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총사령부에서 퇴각명령을 했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동학군 3~4명이 총ㅇ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퇴각을 해서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나 되는 회학동 곽감역 댁에 집결했습니다. 다행히 우리 접의 무장 군인들은 흩어지지 않고 모두 모였습니다.”(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부덕민, 『백절불국의 김구』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2009)
·김삼운, 『백범 김구 평전』 (시대의 창, 2004)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18 개정판)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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