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JTBC 금토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무게감과 가벼움, 메시지와 소비성, 신선함과 클리셰 등을 동시에 보유한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이면서도 내내 여운이 남고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독특한 작품이다. 젊은 치기가 넘치면서도 깊이가 있는 이 이원론적 재미와 가치라니!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내용은 간단하다. 박새로이(박서준)는 고교 때 장가그룹에 다니던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가 부당 해고당한 뒤 장대희(유재명) 회장의 아들 근원(안보현)의 뺑소니에 목숨을 잃지만 대희의 음모로 외려 감옥에 간다. 출소 후에 이태원에서 첫사랑 오수아(권나라)와 재회한다.

그의 꿈은 복수. 안 해 본 일 없이 모은 돈으로 이태원에 단밤포차를 차리고 명문대를 포기한 조이서(김다미)를 매니저로, 트랜스젠더 마현이(이주영)를 셰프로 영입한다. 그리고 요리 경연에서 장가를 무너뜨리고 프랜차이즈에서 재벌로 성장해 복수하고 진정한 사랑도 만난다는 게 기둥 줄거리다.

그런 별로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 왜 그토록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만들까? 우선 10~30대의 절대적인 지지다. 이 시대는 유독 이념이 철저하게 이원화돼 있다. 1970년대까지 태어난 세대만 해도 어른들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생각하거나 반대 의견이 있더라도 대놓고 반발하지 않는 게 몸에 뱄다.

하지만 그 이후의 세대는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의사 표현이 확실하고, 구태의연한 걸 따르는 걸 거부하는 경향이 역력하다. 반드시 명문대에 가야 한다든가, 반드시 대기업에 취업해야 한다든가 등의 고정관념을 거부한다. 나쁘게 보면 개인주의고 좋게 보면 최대한의 행복추구권 행사에 대한 의지다.

앞선 세대는 대중교통에서 앉기가 쉽지 않았다. 노인이 타면 그 즉시 양보해야 하는 게 예의를 떠나 습관처럼 몸에 뱄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잘 양보하지 않는다. 그만큼 피곤하기도 하지만 에고이즘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과 ‘꼰대’들은 나이의 ‘갑질’ 문제로 갈등하곤 한다.

이 드라마의 새로이와 대희의 갈등 구조가 딱 그것이다. 18살 고교 중퇴자가 재벌 회장과의 전쟁을 선언한 뒤 차근차근 이뤄나가는 게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그 판타지 세계에 빠져 대리만족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고, 실낱같은 희망도 품을 수 있다.

그렇다고 40~50대가 이 드라마를 싫어하느냐 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의 시청률도 두 자릿수에 이른다. 주인공은 20대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20~40대가 살아가는 공간이나 50대가 겪는 고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새로이의 어릴 적 상처는 서민이라면 누구나 한 가지쯤 가졌을 억울함이다.

달걀에 불과한 새로이가 거대한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 한 발 한 발 계단을 오르는 과정은 무술만 없을 뿐 무협영화의 ‘도장 깨기’에 다름 아니라 손에 땀이 나고 다음 회가 기다려졌던 것이다. 인물관계도 잘 짰다. 형을 밀고 장가의 후계자가 되는 근수가 단밤포차 ‘알바’ 출신이라는 점부터 그렇다.

수아는 장가의 간부라 새로이와 대척점에 섰다. 근원은 수아를, 근수는 이서를 짝사랑한다. 이서는 사랑한다며 자신의 마음을 받아 달라 애원하지만 새로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수아 때문에 갈등하다가 결국 이서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룹 승계 1순위였던 근원은 폭력조직원이었던 과거가 있다.

캐스팅도 절묘했다. 자신보다 10여 살은 많을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낸 유재명은 거론할 필요도 없고, 박서준, 김다미, 이주영 등의 연기력에도 빈틈이 보이질 않는다. 다만 안보현은 강한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기엔 아직 깊이가 안 보이고, 김동희는 섬세함까지 기대하기엔 많이 부족한 게 아쉽다.

신의 한 수는 마현이이자 이주영이다. 13회의 최강포차 경연에서 그녀는 근수가 흘린 뉴스에 대해 트랜스젠더라고 당당하게 인정했다. 이는 10~30대의 젊은이부터 의식이 깬 중장년 이상의 연령층도 고루 포용할 수 있는, 답답한 양가성의 이 시대에서 통쾌한 편견 깨기의 한방으로 기록될 것이다.

▲ 이상 JTBC 제공.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내 삶의 주체가 나인 게 당연한, 소신에 대가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네가 너인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납득시킬 필요는 없어” 등의 대사는 위의 시퀀스와 같은 맥락의 소화제다. 물론 작가의 젊은 패기가 철학적 깊이까지 파고드는 사색에 이르지 못한 건 아쉽다.

인류의 종교의 기원은 후기 구석기의 삼위일체의 여신 트리비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로부터 바퀴가 발명되던 BC 4000년까지는 가모장제가 유지됐었지만 고대 그리스에 와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아들 천신 우라노스와 결혼하면서부터 우라노스가 왕이 됐듯 가부장제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이렇듯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인류의 모든 관습부터 문화, 영화, 드라마, 광고 등 각종 콘텐츠는 남자가 주인공이고, 그게 당연함을 은연중에 세뇌시키는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을 따른다. 이 작품도 예외 없이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구보다 당당했던 이서의 새로이에 대한 종속화가 그렇다.

수아가 보육원 시절부터 지원을 받은 장가에 입사해 대희에 충성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로 보나, 인과관계로 봤을 때 지극히 당연함에도 감정 때문에 흔들리고 자책감을 갖는 것 역시 여자를 주체적 존재로 못 보는 한계를 드러낸다. 게다가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만 추구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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