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디즈니가 만든 SF 어드벤처 ‘투모로우랜드’(브래드 버드 감독, 2015)의 주제는 ‘꿈은 미래’다. 말미에 주인공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꿈을 꾸는 자들이 힘을 합해 미래를 건설하자’고. 등급은 ‘12세 이상 관람가’라 어린이가 주인공이고 어린이들의 얘기를 펼쳐가지만 어린이들이 보기엔 좀 어렵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폐허의 황무지 위에서 잔존자들이 생존의 전쟁을 벌이는 디스토피아의 세계관이라면 이 영화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평행이론 속에 과거의 붕괴와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그리는 듯하면서도 미래는 먼 게 아니라 과거나 현재와 차원만 다를 뿐 공존한다고 웅변한다.

‘꿈이 환상이 아닌, 미래’라는 주제다. ‘현존재는 본래적 존재인 도래적 존재와 곧 조우한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쓴다. 살짝 난해하지만 아이에게 꼭 챙겨 줄 작품!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과 ‘라따뚜이’로 거푸 오스카를 거머쥔 감독의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세련된 연출 솜씨로 펼쳐진다.

나사가 우주선 발사대를 철수시키려 하자 그렇게 되면 엄마 없이 자신과 남동생을 키우고 있는 아빠의 실직으로 이어지기에 어떻게든 이를 막으려던 10대 소녀 케이시는 경찰에 잡힌다. 아빠의 도움으로 풀려나던 그녀는 경찰이 되돌려준 자신의 소지품 중 못 보던 T 이니셜의 핀 하나를 발견한다.

그건 현재와 공존하는 미래의 유토피아 투모로우랜드로 가는 열쇠였다. 케이시는 핀의 비밀을 풀기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골동품 상회를 찾아가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그들의 레이저 건 공격을 받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신비 소녀 아테나의 도움으로 그들을 물리친다.

아테나는 예전엔 투모로우랜드에 보내질 현명한 후보를 선별하는 일을 했지만 지배자 데이빗 닉스에게 반기를 든 천재 발명가 프랭크를 도왔다가 함께 추방됐다고 설명한다. 핀은 예전에 모집자로 활동할 때 갖고 있던 열쇠 중 마지막이었고 데이빗이 보낼 로봇을 피해 프랭크의 집으로 데려간다.

로봇들은 케이시를 내주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하지만 프랭크는 전쟁을 선택한다. 58일 뒤 있을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투모로우랜드로 가서 프로그램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 파괴, 인구 증가, 전쟁 등의 인재로 지구의 종말이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그들을 방관하려 했지만 프랭크는 어떻게든 구원하고자 했다. 왜냐면 데이빗은 원래 투모로우랜드에서 나고 자랐지만 프랭크는 원래 현 차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우연히 투모로우랜드로 가게 돼 거기서 성장한 이중국적자였기 때문에 본적지가 망하는 걸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테나는 프랭크가 어렸을 때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투모로우랜드로 이끈 로봇이었다. 셋은 우여곡절 끝에 투모로우랜드에 들어가지만 데이빗의 강력한 저지에 곤란을 겪는다. 영화의 주제를 쉽게 전술했지만 사실 이 디테일은 쉽지 않고 여러 개의 소재가 하나의 주제를 만드는 구조주의 형태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주제는 진정한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이다. 어린 프랭크와 케이시가 처음에 봤던 투모로우랜드는 유토피아였다. 하지만 노인이 된 프랭크가 케이시와 되찾아간 투모로우랜드는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다. 프랭크는 많이 늙었지만 데이빗은 50년 전 즈음보다 더 젊은 모습이다.

인구는 줄었고 넘치던 활기는 사라졌다. 현 차원의 사람들은 58일 뒤 지구(혹은 현재의 3차원)가 멸망하는 것도 모른 채 각자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 그중에는 58일 전에 죽을 사람도 있고, 딱 그날 죽을 사람도 있으며, 지구만 멀쩡하다면 최소한 58년 이상 살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다가 갑자기 죽는 게 행복일까, 미래를 보는 투모로우랜드 인들이 행복한 것일까? 사람과 로봇의 정체성도 묻는다. 데이빗의 횡포 혹은 수수방관으로 망할 현세를 구하려는 프랭크를 돕는 유일한 조력자 아테나는 그리스 신화의 지혜와 전쟁의 여신이다.

전쟁은 평화의 반대지만 지구의 오랜 역사에서 보듯 전쟁이 평화를 지킨 아이러니는 엄연히 존재한다. 리들리 스캇의 ‘블레이드 러너’부터 스티븐 스필버그의 ‘A.I.’까지 각종 SF 영화에선 로봇과 사람의 경계, 로봇과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심오한 질문과 깊은 고찰을 던진다. 이 작품에선 아테나다.

그녀는 철저하게 임무만 수행하도록 프로그래밍됐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거짓말도 할 줄 안다. 케이시가 질문을 쏟아내자 자꾸 그러면 전원이 나간다며 진짜 로그 아웃된 듯 기절한다. 하지만 이것은 연기다. 프랭크가 소년이던 시절의 그와 아테나의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어른들로 치면 사랑이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그런 직접적인 감정이 아닌 우정과 연민과 믿음과 의지(依支) 등이 뒤범벅된, 이 영화처럼 다원적인 정서다. 끝부분에서 아테나는 꿈을 가진 사람끼리 협력해 좋은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건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경이롭다.

자신만의 편리함을 위해 다른 차원의 사람들의 멸망 따윈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데이빗과 프로그램 안에서 스스로 진화한 아테나 중 누가 더 인간적일까? 두 차원이 각각 과거와 미래 혹은 현재와 미래로 설정돼 있지만 타임머신 같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영화 초반은 정신 못 차리게 만든다.

조지 클루니의 셀프카메라 형식의 인트로는 디지털 세대에겐 살짝 지루한 아날로그다. 디즈니의 공식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A.I.’처럼 고도의 집중력과 깊은 사색을 요구하진 않으면서도 품격을 갖췄다. 또 조금 지루해질 때쯤 과하지 않으면서 화려한 액션과 비주얼이 충분한 재미를 선사한다.

설정된 이중 공간은 지구가 황폐해지자 우주에 부자와 귀족의 나라 엘리시움을 세우고 지구를 착취하는 계급구조 속의 민중봉기를 그린 닐 블롬캠프 감독의 ‘엘리시움’과 유비적이다. 계급 파괴와 평등의 주장 역시 ‘엘리시움’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그 작품의 색깔보다는 훨씬 더 밝기에 긍정적이다.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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