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뤽 베송의 유통기한은 이제 지난 걸까? 블록버스터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2017)는 ‘제5원소’(1997)에 못 미쳤고, ‘안나’(2018) 역시 ‘니키타’(1990)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다만 ‘안나’는 ‘니키타’ 같은 누아르는 부족했지만 타이틀롤 사샤 루스의 매력과 액션만큼은 봐줄 만하다.

1985년 모스크바에서 암약하던 CIA의 요원들이 KGB에 잡혀간다. 5년 후 세계를 돌며 신선한 얼굴을 찾는 파리 모델 에이전시의 캐스팅 디렉터는 모스크바 재래시장에서 마트료시카를 파는 안나를 발견하고 스카우트한다. 뛰어난 매력의 안나는 금세 스타덤에 올라서고 동료 모드와 동성애에 빠진다.

축하 파티에서 회사 주주인 올레그를 소개받은 안나는 그와 2달간 만나면서 키스는 하지만 잠자리는 거부한다. 몸이 닳은 올레그에게 안나는 그의 참모습을 보여 달라 주문하고, 그는 자신이 무기 밀매를 한다고 비밀을 털어놓는다. 샤워하고 오겠다고 욕실로 간 안나는 권총을 챙겨와 그를 살해한다.

오래전 안나는 부모를 여의고 창녀로 팔렸다 페티가 구해주자 동거에 들어갔다. 범법자인 페티가 안나를 마약중독자로 만들자 지옥에서 벗어나고픈 그녀는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르려 해군에 지원했는데 새 요원을 찾던 KGB의 알렉스의 눈에 띈다. 그는 페티를 제거하고 안나를 본부로 데려간다.

그렇게 고된 훈련을 거친 끝에 알렉스가 안나에게 임무를 맡길 것을 중간 간부인 올가에게 제안한다. 안나는 완벽하진 못했지만 첫 임무를 무사히 수행해내고 이후 모델로 가장해 전 세계를 돌며 KGB가 제거하고자 하는 요주의 인물을 살해하는가 하면 알짜 정보를 캐 보고하면서 믿음을 주게 된다.

스카우트할 때 알렉스는 5년만 일하면 은퇴시켜 주겠다고 약속했고 안나는 KGB 국장 바실리에프에게 그걸 확인하지만 죽지 않는 한 못 벗어난다는 답만 돌아온다. 낙담한 그녀에게 이번엔 독일 대사를 죽이라는 지령이 떨어진다. 그런데 그건 오랫동안 그녀를 감시한 CIA 요원 레너드의 함정인데.

액션만 놓고 본다면 ‘니키타’, ‘툼 레이더’, ‘한나’ 등의 여전사를 앞세운 유사 작품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면서도 더 화려하다. 건푸 액션부터 접시 등을 활용한 청룽식 맨몸 액션까지 눈이 즐거울 만큼 현란하다. 실제 모델 출신인 루스는 연기도 액션도 처음인데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수준을 보여준다.

안나를 이용하면서도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지는 양 정보국의 핵심 요원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와 루크 에반스의 안정된 연기 솜씨도 루스를 도와 작품의 완성도에 큰 도움을 준다. 이 영화는 각종 경계가 무너진 글로벌 시대에 국적 등 기성의 소속이 아니라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고 웅변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안나는 일찍부터 체스에 남다른 실력을 보였다. 사고로 부모를 잃은 뒤 거리의 여자로 살던 그녀에게 가장 안전하고 편한 곳은 집이었다. 억지로 페티의 범죄 현장에 가담한 그녀가 페티에게 계속 “집에 가자”고 보채는 건 그런 뜻이다.

서양인들이 ‘Home sweet home’을 입에 달고 가족의 중요성을 수없이 강조하는 이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유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이자 동물이기에 더욱 보장받아야 한다는. 동물도 보금자리가 있듯 사람은 당연히 자신을 보호해 주고 가장 사랑해 주는 가정이 포근하기 마련.

안나가 마트료시카를 판매하는 시퀀스는 정체성을 묻는 상징성. 이 러시아의 목각인형은 내부에 크기가 작은 복제 인형이 끝없이 들어있다. 알렉스와 레너드를 한자리에 모은 안나는 “날 인형으로 만들면 어떤 모습일까? 마트료시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작은 인형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소녀 시절 안나는 체스를 잘 두는 영특한 공주였지만 거리의 여자가 됐고, 다시 KGB의 킬러와 인기 모델로서 동시에 산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그녀는 남자들의 애정공세와 더불어 동성의 구애까지 받는다. 게다가 CIA와 얽힘으로써 이중, 삼중 첩자가 된다. 그녀조차도 자신의 정체가 헷갈린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씨족사회와 부족사회를 거쳐 도시국가에서 현재의 국가로 집단의 규모를 키워왔다. 물론 공통된 언어와 문자가 있었던 배경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현재 어떤가? 영어에 배타적이었던 유럽의 다수는 이젠 모국어만큼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다른 대륙도 마찬가지다.

무역이나 외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다른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배타와 경계가 무너지면서 쇄국이란 게 의미가 없어졌다는 인식의 전환이다. 자유롭게 세계를 여행하고 타국인과 스스럼없이 교류하는 가운데 다양한 문화를 즐기는 게 이 시대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니 더욱 개방하자는 물결이다.

냉전 시대가 지난 21세기에 굳이 현실감 떨어지는 CIA와 KGB의 첨예한 대결을 기둥 줄거리에 세운 기획력은 패착이지만 그 구조 속에서 자유와 정체성을 웅변하는 메시지는 나쁘지 않다. 안나에게 계속 선택이 강요되는 건 현대인이 흔히 겪는 생활의 일부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것이다.

안나를 믿는 알렉스와는 달리 “연고도 가족도 없다? 약점이 없으니 언젠가 배신하겠군”이라며 의심하는 바실리에프는 글로벌 시대를 인정하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고루한 세력이다. 이념 대신 자유를 추구하는 안나와 준거틀이 다를 수밖에. “사람을 믿지 말고 나를 믿어”라는 대사가 결론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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