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워너브라더스의 ‘그린 랜턴’에서 슈퍼히어로로 데뷔했다 낭패한 라이언 레이놀즈가 디즈니로 와서 성취감을 이룬 ‘데드풀’(팀 밀러 감독, 2016)은 국내에서 332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잘생기진 않더라도 흉하지 않고 최소한의 정의감은 갖춘 기존 영웅과 사뭇 다른 데드풀은 어떤 마력을 부렸나?

자비에 박사의 엑스맨 양성학교 소속 스카우터 콜로서스가 엑스맨으로 영입하려고 하자 데드풀은 “난 슈퍼히어로가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친다. 기존의 다양한 슈퍼히어로들은 각자의 개성은 강했지만 권선징악의 공통점만은 일치했다. 인류를 구하고자 했다. 물론 이타적인지라 희생정신도 강했다.

대규모 기업을 물려받았기에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물든 천박한 바람둥이인 토니 스타크조차도 ‘어벤져스’에서 외계인 퇴치를 위해 맨해튼 시민을 희생시키려는 정부에 반발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미사일을 우주공간으로 실어 날랐다. 또 슈퍼히어로들은 모두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안고 산다.

‘맨 오브 스틸’의 슈퍼맨은 지구인이 자신을 위험인물로 여기는 배타적 시선을 가진 데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자신이 영웅인지 범죄자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스파이더맨’ 역시 영웅과 연인을 놓고 방황하며 친구의 아버지의 죽음에 연관된 트라우마를 떨치기 힘들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내재된 자만심에서 근거한 악의 유혹에 시달린다. 물론 데드풀에게도 고민은 있다. 뮤턴트가 되는 과정에서 얼굴은 물론 온몸의 피부가 흉측하게 일그러졌기 때문에 사랑하는 약혼자 바네사 앞에 나타날 수 없다. 그런데 그의 핸디캡은 딱 그 선의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이다.

그 속에 왜 그렇게 됐는지, 그 의의가 뭣인지, 앞으로 그 외모에도 불구하고 내면은 얼마나 아름다운 청년으로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냥 이렇게 만든 놈을 잡아 고친 다음 그 대가를 치르게 한 뒤 바네사와 ‘섹시하게’ 살고픈 게 목적이다. 정의감도 배려심도 없이 오직 자신만을 생각한다.

모든 영웅은 말수가 적다. 그러나 데드풀은 욕과 성적인 저질 비속어가 풍부한 교양 없는 말투를 따발총처럼 쏟아내는 수다쟁이다. 절대로 영웅답지 않다. 그렇다고 거창한 해결사도 아니다. 20대에 그는 최정예 특수부대에서 근무했다. 수재나 부잣집 아들은 그런 조직에 기꺼이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오로지 믿는 것은 몸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원하거나 스카우트된다. 제대한 뒤 데드풀이 되기 전 그는 여자를 쫓아다니는 스토커나 처리해 주는 등 하찮은 해결사 일로 하루하루를 먹고살았다. 한국적으로 해석하면 그냥 뒷골목의 ‘양아치’다. 데드풀이 된 후에도 그 흔한 자가용 없이 택시로 이동한다.

자신의 외모를 그렇게 흉측하게 만든 아약스와 싸우러 나설 때 총알을 잊고 나오는가 하면 마지막 일전 땐 모처럼 충분하게 준비한 총기들을 담은 가방을 택시에 두고 내린다. 이게 히어로인가? 한술 더 떠 택시비가 없어 특유의 화술로 택시 기사의 혼을 빼낸 뒤 요금을 하이 파이브로 대체한다.

수많은 관객들이 슈퍼히어로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대리만족이다. 영화가 잠시나마 꿈을 현실로 착각하게 만들어 주는 공장이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멜로 영화가 유행된 것은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사랑을 보며 잠시나마 자신도 그런 꿈같은 사랑의 마취제에 흠뻑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악은 많지만 직접은 물론 법으로도 그들을 일일이 처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현실 속에서 법보다 정의란 이름의 폭력으로 근본을 해결하는 히어로의 활약은 합법과 불법의 이분법적 잣대를 떠나 그냥 카타르시스다. 나약한 인간이 초능력을 발휘하는 SF 액션은 성인에게도 치명적이다.

그런데 이제 슈퍼히어로에 대한 대중의 피로도가 높아졌다. 슈퍼히어로는 미국에 집중돼 심지어 북유럽의 천둥의 신 토르조차 미국에서 활약한다. 왜 모든 뮤턴트는 미국에 있는지, 슈퍼맨이 떨어진 데가 왜 하필 미국인지, 미국인조차도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래서 관객들은 전형적인 정형화에 질렸다.

그런데 ‘데드풀’은 관객들에게 매우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닿는다. 힐링 팩터라는 돌연변이 능력 외엔 하늘을 날 수도 없는 싸움꾼일 뿐이다. 전투능력만 따져도 뮤턴트 중에서 그리 강한 편이 아니다. 지원군인 콜로서스에 비하면 나약하고 하다못해 소녀 네가소닉 틴에이지 워헤드보다 한참 약하다.

대중이 열광하는 그의 매력은 뮤턴트지만 의외로 인간적이라는 것. 자만심에 가득 찬 엑스맨들과 달리 거짓말과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유머감각만큼은 최고다. 그 모든 것은 ‘화장실 유머’라는 키워드로 연결된다. 슈퍼히어로 영화치곤 적은 5800만 달러로 뛰어난 가성비를 내는 비결이다.

세계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한다. IS가 테러를 일삼는 와중에 코로나19까지 가세했다. 각 국가 간의 정치적 이해득실과 이합집산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미래가 불안하다. 자신의 스타크 회사가 무기를 판 중동의 테러세력과 싸웠던 아이언맨은 이젠 우주의 신 타노스를 물리친 판타지가 됐다.

이에 반해 ‘데드풀’은 생활밀착형 액션 코미디다. 인간 본연의 최소한의 일탈과 방종을 향한 욕구를 자극하기로 이보다 더 좋은 영화는 최근에 없었다. “라이언 레이놀즈가 연기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줄 알아?”라고 데드풀이 자기 합리화를 주장할 때 뒤로 넘어지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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