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말씀드린대로 올해가 임시정부 100주년입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우선 임시정부를 이야기 하자면 그 전에 3·1운동에 관해서부터 말을 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3·1운동에서 확인한 독립을 향한 국민들의 뜨거운 열망이 한 달여 뒤에 곧장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것이니까요. 선생님께서는 3·1운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미년 독립선언을 생각하면 그때 기쁨과 슬픔이 함께 터져 나오면서 피가 파도보다 격하게 끓어오르는 마음을 진정하기가 어렵습니다. 3월 1일은 말하자면 가장 신성한 날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독립선언이란 것은 누구 하나가 작정한 것도 아니고 2000만 동포가 만든 것입니다. 표현하기를 선언이라고 하지만 말로만 된 것이 아니란 것은 후손들도 잘 알 것입니다. 3월 1일은 순결한 대한인들의 피로 만들어진 날입니다. 어찌 그날의 정신을 잊겠습니까.”

-독립선언이 있었던 1919년 3월 1일이면 선생님께서는 미국에 계실 때지요? 연세는 마흔한 살이 되셨을 때군요.

▲ 사진 출처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김문 작가)

“그렇습니다. 독립선언은 해외 교민들에게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소식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가슴 아픈 비애와 치욕을 받아 오다가 그날에서야 비로소 역사상에 큰일을 일으켜 놓은 것이니 기쁘고 또 간절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고 두려운 감정이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교민들도 나라를 위해 가진 재주와 힘을 다해 생명을 희생하여 죽기까지 용감하게 나아가자고 다들 결심을 했었지요. 그때 당시에 미주에서 활동하던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들, 그러니까 이승만 박사나 박용만 선생 그리고 저를 두고 편을 가르는 말들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말들도 사라질 것이라고 다들 기대를 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당시 미주 한인 사회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우선은 여론 활동이었습니다. 3·1독립선언 이후 국면에서 미주에 있는 한인들은 말하자면 특별한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미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공화국으로 자유와 정의를 대표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니 미국이 훗날 움직인다면 우리 대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교민들 하나하나가 이 소식을 미주 사회에 널리 알리고 신문과 잡지를 이용해 여론을 환기시키고 교회에다 한국 교인들의 고통을 널리 알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곧 공공외교 활동을 한 겁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재정 지원이었습니다. 2000만 민족이 다 일어나는 때에 재외 동포들은 국내로 쉽게 들어갈 수는 없으니 몸을 바치는 대신에 재정 공급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교민들은 ‘금전으로써 싸우는 군인’이라는 생각으로, 매주 수입에서 20분의 1을 걷고 특별의연금도 모았습니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국내에 있나 해외에 있나 다르지 않았던 거네요. 3·1운동 같은 큰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만리타국에서 전해 듣는 심정은 많이 복잡했을 것 같습니다.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만 선생님께서는 3·1운동의 의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말씀대로 간단히 답하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만세만 가지고 독립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만세의 힘은 심히 위대했다고 하겠습니다. 대내적으로는 전 국민을 움직였고, 대외적으로 전 세계의 시선을 모았다고 할까요. 만세 전에는 미국 정부를 움직이고자 갖가지 애를 써도 얻은 것이 크지 않았는데, 만세 이후에는 미국 의원들과 정부가 먼저 나서 대한의 일을 알리려고 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저는 상원에서 우리를 위해 소책자를 돌리는 모습도 봤습니다. 가히 ‘평화적 전쟁’의 효과라고 하겠습니다.

만세 소리가 컸다고 해서 적들이 바로 쫓겨가진 않습니다만 그날의 선언으로 미국을 포함한 세계 열방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사와 용기의 수준을 알게 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성과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국민들이 서로 “우리 국민 전체가 똑같이 독립할 의지가 있구나” 하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로부터 독립 운동을 크게 해보자는 약속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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