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프랑스 예술영화에 대한 국내 관객의 선입견은 ‘화장실에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나온 듯하다’는 것이다. 특유의 용두사미 같은 결말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를 겸하는 니콜라스 베도스 감독의 ‘카페 벨에포크’는 정반대다. 신파, 작위성, 유치함 없는 기승전결이 마음을 상쾌하고 따뜻하게 해준다.

신문에 만화를 연재했던 빅토르는 종이가 사라지고 인터넷판으로 발행되자 실직해 무기력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중년의 외아들 맥심은 자기 회사를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상담사인 아내 마리안 역시 바쁘게 살아간다. 맥심의 친구 앙투안은 핸드메이드 시간여행이란 아이템으로 성공했다.

꽤 큰 규모의 스튜디오를 짓고 배우들을 고용해 고객이 원하는 시대와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주고 만만치 않은 비용을 받고 있다. 마리안은 빅토르의 친구이자 그를 해고한 연하의 신문사 편집장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 맥심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위해 거액을 들여 시간여행을 구매해 준다.

빅토르가 원하는 시각은 그가 25살이던 1974년 단골 카페에서 첫사랑을 처음 만나던 때다. 앙투안은 자신의 연인인 배우 마르고를 당시의 첫사랑으로 캐스팅하고 빅토르가 그려준 그때 상황에 맞춰 세트와 배우를 갖춰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그런데 앙투안과 마르고는 사랑하면서도 계속 다툰다.

마리안은 빅토르를 집에서 내쫓은 뒤 맥심에게 남자가 있음을 털어놓는다. 빅토르는 처음엔 시간 때우기 정도로 생각했던 시간여행에 점점 빠져들고, 술, 담배, 마리화나 등의 일탈을 경험하는 가운데 어느덧 마르고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앙투완은 질투하고 빅토르는 마르고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워낙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 속의 연극이라는 구조와 시너지 효과를 내 매우 큰 흥미를 일으켜 재미를 준다. 주제는 크게 아날로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시간(하이데거), 헤라클레이토스의 유전(흐르며 변함)과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의 대립, 그리고 ‘장자’의 호접몽론과 리플리 증후군의 혼합이다.

맥심의 직업은 OTT용 미니시리즈 제작이다. 그 예고편을 보고 시큰둥했던 빅토르는 “난 연필과 물감이 좋아. 또 난 1970년대가 좋아. 그땐 진보니 보수니 해서 갈라서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중얼거린다. 침대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지만 마리안은 특수 안경을 착용하고 VR로 가상 세계를 일주한다.

그가 과거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땐 카페에 앉아 휴대전화를 본 게 아니라 상대방과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비게이션을 꺼”라고 소리치고 아내는 코웃음을 친다. 일탈할 때 지미 헨드릭스를 닮은 배우와 제니스 조플린의 ‘Me and Bobby McGee’가 나온다.

젊은 지성들이 이념보다는 평화를, 국력보다는 반전을, 형식보다는 자유를 외쳤던 1970년대를 그리워하는 그의 마음은 히피문화에 가있지만 육체는 생계형 가장에 정체돼있었고, 이젠 늙어서 아내에게마저 토사구팽 당했다. 그가 만화를 그릴 수 있었던 건 꿈을 믿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중반까지만 해도 ‘밉상’인 듯했던 마리안에게 감독은 후반 즈음 해명의 기회를 준다. “남편은 무기력하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성가시기나 하지, 하는 일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따분하지”라며 생계형 아내로서 살아온 지난날의 허무함을 토로하는 것. 그녀는 추억을 안 믿은 게 아니라 못 믿었다.

그들과 더불어 “사람은 변한다”와 “안 변한다”로 대립하는 앙투안과 마르고는 마치 “만물은 유전하고 그래서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던 헤라클레이토스와 만물불변설로 그와 갈등하던 파르메니데스 같다. 첫사랑의 추억을 되살리고자 했던 빅토르는 그러나 마르고에게 빠진다.

모든 상황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흘러가지만 결론은 합리론과 경험론을 결합하려 한 칸트처럼 유전론과 불변론의 화합을 시도한다. 첫사랑의 추억을 되살리고자 했던 빅토르가 엉뚱하게 마르고의 새 사랑에 빠지는 건 어느 세계가 진짜인지 알 수 없다는 호접몽론을 의미한다.

거기에 거짓말을 자꾸 하다 보면 그걸 진실로 착각한다는 리플리증후군과 자신의 미녀 조각상에 반한 피그말리온효과까지 접목했다. 줄기는 첫사랑에 목마른 빅토르와 현실이 따분해 모든 게 귀찮은 마리안이었지만 애증이 공존하는 불가해한 앙투안과 마르고의 갈등과 긴장의 해결점으로 확장된다.

빅토르가 “난 늙었다”라고 거리를 두려 하자 마르고는 “저도 늙었어요”라고 응수한다. 앙투안은 “다 가짜, 나도 가짜다”라고 뇌까린다. 추억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가상 세계를 만들어 주는 일이 일상인지라 그는 호랑나비가 돼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마르고를 못 믿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썼지만 마리안은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떠들면서 프로이트를 거론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시발은 리비도다. 부부의 대사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된 내용이 등장한다. 유물론을 배격한 프로이트와 달리 마리안은 유물론자였기에 히스테리가 심했다.

‘여인의 향기’의 OST ‘Por una caveza’, 몽키스의 ‘I'm a believer’, 바카라의 ‘Yes sir, I can boogie’ 등이 아련한 상념의 호수로 인도한다. 늙어서 추한 게 아니라 늙었다고 포기했기에 추하다는 메시지도 훌륭하다. 변하는 건 사람이지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따뜻하고 정열적인 로맨스다! 2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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