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세 얼간이’(라지쿠마르 히라니 감독, 2009)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국내에서 가장 극찬을 받은 인도 영화다. 재미, 감동, 교훈 중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재미있고 바람직한 상업 영화의 교과서다.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파르한이 전화를 받더니 갑자기 쓰러지고 기장은 출발지로 회항한다.

공항에 내린 파르한은 멀쩡하게 걸어간다. 명문 공대 ICE 졸업 후 연락이 두절된 란초의 주소를 찾았다는 동창 차투르의 전화에 꾀병을 부렸던 것. 파르한은 란초와 함께 단짝이었던 라주를 불러내고 그렇게 그들의 여정은 시작된다. 10년 전 차투르는 란초에게 훗날 누가 더 잘되나 내기를 했었다.

파르한과 라주는 보고 싶어서, 성공한 차투르는 대학 때 만날 1등만 해서 주눅 들게 만들었던 란초에게 자랑을 하고 내기에 이겼음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자괴감을 안겨주기 위해서 만나러 간다. 심라에 도착한 그들은 물어물어 으리으리한 란초의 집으로 가지만 란초는 그들이 알던 얼굴이 아닌데.

이 작품은 사회인이 된 4명의 대학 동창이 란초를 찾아가는 여정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그리는 동시에 대학 때의 회상 신을 교차 편집한 구조로 진행되는 미스터리 스타일인데 꽤 재미있다. 란초가 주문처럼 외우는 ‘All is well’을 주제로 한 뮤지컬이 인도 영화 특유의 재미를 주고 교훈도 충분하다.

파르한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결정한 공학자가 되기 위해 뛰어난 사진 실력을 포기한 채 ICE에 입학했다. 룸메이트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 라주와 굉장히 개성 강한 란초. 팬티 바람으로 충성을 맹세케 하는 신입생 환영회가 선배들의 주도로 열리지만 란초는 전통을 거부하고 그들을 골탕 먹인다.

손가락에 반지투성이인 라주는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ICE에 들어왔다. 그와 파르한은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목표라 학교 체제에 순응하지만 란초는 다르다. 그는 공학에 관심이 많고 애정도 크지만 학교는 스트레스 공장이 아니라며 취업 기계로 훈련시키는 걸 거부한다.

차투르는 한 마디로 간신이다. 체제에 아부하며 출세욕을 불태운다. ‘세 얼간이’의 적은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며 출세지향적인 총장 비루다. 그는 신입생들에게 뻐꾸기의 탁란을 예로 들어 경쟁자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며 정자까지 들먹인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전쟁은 당연하다.

비루는 우주에선 평범한 볼펜을 쓸 수 없기에 과학자들이 수백만 달러를 들여 개발했다며 자신의 펜을 보여준다. 란초는 “우주비행사들은 왜 연필을 쓰지 않았죠? 그럼 수백만 달러를 안 썼어도 됐을 텐데”라며 도발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소년 밀리미터가 그걸 보고 제대로 한 방 먹였다며 웃는다.

란초가 “넌 학교 안 가냐”고 묻자 소년은 “돈이 없다”고 답한다. 란초는 “학교에 돈 줄 필요 없어. 그냥 교복만 사서 수업에 들어가면 돼”라며 돈을 준다. 교수가 기계가 뭐냐고 묻자 란초는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는 장치’라고 간단히 답하고 차투르는 교과서를 달달 외우자 교수는 란초를 쫓아낸다.

란초가 나가다 되돌아오자 교수는 이유를 묻는다. 란초는 장황하게 책의 사전적 의미를 설명하고 교수는 좀 쉽게 얘기하면 안 되냐고 역정을 낸다. 파르한은 “아까 그렇게 말했는데 안 들으셨잖아요”라고 응수한다. 그 후 란초는 아무 수업이나 닥치는 대로 듣고, 아무 기계나 만지며 자유롭게 배운다.

그는 “비루의 둥지에 들어온 자유로운 영혼의 새 같았다”는 파르한의 표현이 딱 맞는 천재였다. 딱 한 명 란초와 비슷한 조이라는 신입생이 있었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아버지의 기대를 받는 그는 아버지를 만족시키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제작한 드론을 비루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목을 맨다.

배가 고픈 세 친구는 한 결혼식장에서 음식을 먹다 비루에게 걸린다. 비루의 큰딸의 결혼식이었던 것. 란초는 천박한 자본주의 약혼자와 결혼하려는 작은딸 피아와 친해지고 그녀에게 결혼하지 말 것을 종용한다. 란초가 예사롭지 않은 사람인 걸 안 피아는 점점 그에게 빠져들지만 왠지 거리를 둔다.

외적인 교훈은 도식적인 교육으로써 오직 취업을 위한 성적만 추구하는 교육 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학교는 학문을 쌓는 곳이지 점수 따는 법을 배우는 공장이 아니라는 메시지다. 비루와 란초는 보수와 진보의 아이콘이다. 란초는 고루한 관습을 따르지만 란초는 바뀐 세상에 맞춘 변화를 추구한다.

감독은 대놓고 카스트 제도를 조롱하고 가문, 재산, 신분 등 자본주의에 근거한 표피적 조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인식론을 때린다. 란초는 차투르의 스승의 날 기념 축사를 살짝 바꿔 그, 비루, 교육부 장관을 조롱한다. “무턱대고 외우기만 하면 저렇게 돼”라며 공장화된 대학을 꾸짖는다.

우리가 추구할 게 성공이냐 행복이냐, 자만심이냐 성취감이냐를 따진다. “이 나라는 피자는 30분 만에 오는데 구급차는 왜 안 와?”라는 말은 인도뿐만 아니라 오직 돈으로 성공과 행복을 규정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통곡이다. 노골적인 마르크스의 공유론이고 종교에 딴죽 거는 유명론적 실존주의다.

미래가 두려워 신을 믿었던 라주는 “미래가 그렇게 두려운데 현재는 어떻게 살아?”라는 란초에게서 인생을 깨닫고 점수도, 학위도, 직장도 구걸하지 않고 당당해진다. “두 다리를 잃고 나서야 제대로 서는 법을 배웠다”는 대사가 주제다. 절경의 판공초 호수가 나오는 마지막 시퀀스는 명불허전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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