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지금 말하자면 일제의 식민사관 같은 것이군요. 붕당 정치 같은 것을 예로 들어서 조선인들은 원래 대립과 분열을 잘한다고 민족성을 폄하하는 얕은 수 말입니다.

“그렇지요. 스스로 우리 민족을 까내리면서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야 말로 통일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우리 국민은 본래 통일된 민족입니다. 언어도 하나요, 문자도 습관도 하나요, 정치적으로도 중국 모양으로 지방 권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을 유지한 나라입니다. 누군가는 지방열(地方熱·같은 지방 사람들이 뭉쳐 다른 지방 출신을 배척하는 일)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고 합니다.”

-선생님, 불편하신 말씀을 자꾸 물고 늘어지는 듯하지만 후세의 연구가들은 임시정부 안에 파벌이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외교론과 무장투쟁론 같은 방법론 갈등도 있고, 좌우 이념 갈등도 있었지요. 그리고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서북(西北)파,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기호(畿湖)파의 갈등도 있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그런 지방열은 없다고 단언하겠습니다. 내가 노동국총판이던 시기를 따져봅시다. 그때 가령 사람들은 이동휘 국무총리를 두고 ‘서울 사람을 대할 때는 서울깍쟁이라고 야단치고 평양 사람을 보면 평양 상놈이라고 한다’면서 이 총리를 지방열이 있는 자라고 몰아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함경도 출신이지만 그가 세운 90여 개 학교는 대부분이 개성과 강화 지역에 있었습니다. 이동녕 내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은 지방열이 있을까 걱정할 인물들이지 그걸 만들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규식 법무총장은 해외 생활 10년 동안 동포간 대동단결을 부르짖었던 분입니다. 저를 두고도 더러 ‘안창호가 서도를 위해서만 일했다’고 합니다. 서도를 위해서라도 뭔가 일을 했다고 말씀해주신다면 고맙기는 하지만 우리나라가 얼마나 커서 황해도니 평안도니 하고 따지겠습니까.

사지가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더라도 내부의 신경과 혈맥이 관통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하는 통일은 이 신경과 혈맥의 장애를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사람들 중에도 국가를 위해 단결을 하기보다 조그마한 일에도 저 사람이 나를 믿나, 잘 대접하나 하고 살핍니다. 우리는 단지 생각이 같으면 동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이동휘 총리와 밥을 먹으면 그쪽을 따른다고 수군거리고, 이시영 총장과 같이 있으면 또 이쪽을 따른다고 말하니 자연스럽게 교류가 꺼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통일이 되고 안 되고는 남을 탓할 게 없습니다. 독립을 위해 나선 자는 다 동지입니다. 그들이 모두 같이 죽을 동지가 아닙니까. 그리고 임시정부는 독립 운동의 본부니 우리 모든 동지가 그 아래로 모이면 통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 친소 문제가 아니라 독립을 추구하며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같이 일한다면 통일이 된다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사실 이승만 대통령과는 안 좋으셨지요.

“이승만 박사는 외교에 많은 무게를 두었습니다. 독립선언과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이후에로는 외교의 길이 더 크게 열려 여론을 숭상하는 미국에서 일반 인민들의 큰 동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박사의 노력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독립 운동을 함에 있어 국제 연맹이나 미국만 의지하는 것은 스스로 독립할 자격이 없음을 자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게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을 믿고 먼저 자립적이라고 조직적인 국가를 성립한 후에야 조력도 얻고 외부의 지원도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고 바랄 바는 오직 ‘우리의 힘’뿐인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더라도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든 이동휘 총리든 아무리 누가 밉고 처사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우리의 수령이니 복종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그럼 이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요. 선생님께서는 초기부터 임시정부가 안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고 누구보다 애착을 가지고 정무를 보셨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중도에 임시정부에서 나가셨지요. 1921년 5월 12일에 사퇴를 하셨으니 임시정부 활동은 만 2년이 조금 넘게 하신 거네요.

“네 맞습니다.”

-그토록 애착을 갖고 활동하신 임시정부의 문을 박차고 나오신 이유가 대체 뭐였습니까.

“어디서부터 말을 하는 게 좋을지…, 당시에 제가 2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하며 매달렸던 임시정부의 일을 내려놓자 주변에서는 ‘그 안에서 누구와 충돌이 생긴 것이다, 아니면 모욕과 괴로움을 당하다가 견딜 수 없어 나온 것이다’라고 각종 추측을 하며 의아해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너무 장황해지니 간단히 말씀을 드리지요.

분명히 그것이 감정상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본디 임시정부에 있던 것이 누가 곱고 예뻐서 그런 게 아니듯 그곳을 나온 것도 누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욕이나 괴로움을 피하려고 나온 것도 당연히 아닙니다. 제가 임시정부를 나온 이유는 당시 정세로 보아 노동국총판으로 일하는 것보다 일개 평민으로서 일하는 것이 독립 운동에 좀 더 유익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대강의 사태를 수습한 뒤 다시 임시정부에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영구히 총리가 되기로 약속한 것 아니냐는 분도 계셨습니다. 말도 안 되는 말씀이지요. 저는 이런 약속을 한 적도 없고 그럴 의사도 없었지만 한편으로 제 스스로 당장이라도 다시 노동국총판이 될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정부로 다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오직 우리 독립 운동에 유익한지 아닌지만 기준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왕 독립 운동을 시작한 후에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모였는데 다 같이 둥글게 앉아 일을 해나갔으면 좋았겠지요.”

-맞습니다.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셨다던 김구 선생 같은 분은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키지 않았습니까. 이름난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끝까지 함께 했다면 해방도 좀 더 앞당겨지고 후손들이 보기에도 좋지 않았겠습니까?

“후손들이 보기에 좋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해방의 시기까지야 단정할 수는 없겠지요. 아무튼 임시정부가 갈라진 원인이나 구성원 누구의 장단점 따위를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독립선언 이후 임시정부 안에 모인 지도자급 인물들은 독립이 완성되는 날까지 한 사람도 변치 말고 끝까지 같이 가자고 절규했습니다. 후손들이 보시기에 부족할지 몰라도 나름대로 이를 위해 애타는 노력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저의 성의와 능력의 부족인지, 시대의 문제인지 노력이 끝내 실패로 끝까지 만 것입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을 하는 게 맞을지 곰곰이 생각한 결론이 ‘부득이 임시정부 안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와 평민의 신분으로 무엇이든 해야 되겠다’였던 것입니다. 답변이 충분히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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