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자현의 시시(詩詩)한 이야기] 청소노동자들은 하청업체와 학교의 책임회피 속에서 유령처럼 존재해왔다. 그랬던 그들에게도 학교 구성원으로서의 권리가 주어져야한다고, 그들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여기저기에 대자보가 붙고 현수막이 걸렸다. 그리고 아직 미흡하지만 일부 학교에서부터 노동자들의 쉼터를 만드는 등 시설과 제도를 개선해나고 있다. 그러면 이제 그들의 노동환경이 나아졌다고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을까.

대학 1학년 때 청소노동자분들과 하루일과를 함께 해볼 일이 있었다. 치우는 입장이 되고 보면 쓰레기통은 복잡하다. 전단지가 구겨져 버려진 위에 먹다만 음료수 캔이 던져진다. 그 위에 일상적으로 벗겨진 각종 포장지들이 쌓이고, 얼음만 컵 안에 남은 아이스커피의 잔해들도 버려지고, 갑작스런 기침에 튀어나온 누런 가래도 뱉어진다. 많이들 목이 마른 여름엔 유독 쓰레기봉투의 주변은 축축하고, 주변으로 금세 파리가 꼬인다.

버리는 이들은 무심하다. 등록금 내에 다 포함된 서비스라고 생각하는지, 치움을 생각하지 않고 버린다. 같이 일한 아저씨는 말했다.

“학생들이 얼음 든 컵을 그냥 버리는 게 참 힘든 일이 돼. 쓰레기통 밑에 물 때문에 치우면서 옷 버리고, 복도는 복도대로 또 닦아야 하니 한번 할 일이 두세 번 일거리가 돼버리니까. 사소한 게 우리한테는 힘든 거야.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게 담배꽁초 버리는 통이 꼭 바로 옆에 있는데도 말야, 그걸 통 옆에 바닥에 버린단 말이지. 그럼 우리는 또 그거 하나하나 줍는 게 일이지. 그런 거만 신경써줘도 우리 일이 훨씬 덜 할 텐데 말이지.”

청소노동자들의 고됨을 덜어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우리’는 그들의 고됨에 대해서 무감각하다. 청소노동자들을 둘러싸고 그들의 임금과 처우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벌이는 중에 쓰레기통 주변으로 흥건한 쓰레기 물에 대한 얘기가 없다.

시에서 말한 ‘인간의 사막’이 바로 이곳이다. 도무지 물기가 남아있을 틈을 주지 않는 곳. 임금, 제도, 시설의 비를 끊임없이 뿌려도 ‘고됨’의 사막화를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태도 속.

청소노동자들의 급여가 대폭 오르고, 쉼터가 확충된 상태라고치자. 내 부모가 그 안에서 청소 노동을 한다고 가정하면, 나는 쓰레기통에 먹다만 음료를 버릴 수 있을까. 일하기 좋아졌으니 쓰레기물이 부모님의 옷을 적셔도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노동의 고됨에 대하여, 돈뭉치를 던진 후에 뒷짐을 지고 뽕을 뽑자고 말하지 말자. 그것이 나와 내 가족이든 타인과 타인의 가족이든, 돈과 노동이 교환되는 사이에 엄연히 사람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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