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임시정부를 나가신 뒤에 가장 힘을 쏟으신 것이 국민대표회의 추진이었습니다. 2년가량 준비촉진위원회, 준비위원회 등을 꾸려가시다가 1923년에 본회를 개최하셨지요. 전국은 물론 해외 각지에서 국민대표 63회 회의가 열리는 동안 124명이 참석한 대규모 회의였습니다. 국민대표회의도 독립 운동에 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하신 사업으로 봐야겠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임시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는 통일이 필요하다는 말을 기회가 될 때마다 했습니다. 국가사업을 제대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통일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 구체적으로는 우선 중앙에 힘을 모으고 또 공론을 세우는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이름을 꼭 국민대표회의라고 할 것은 없지만 아무튼 각 지방, 각 단체의 대표자들이 한 번 크게 모여 힘을 모으고 공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추진한 것이 그 회의였습니다.

국민대표회의는 반드시 필요한 모임이었습니다. 우선 각 방면의 의사가 한 곳으로 집중이 된 후에야 각 방면의 정신과 마음과 힘이 집중이 되니, 그 의사를 모으려면 불가불 국민 대표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인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 이미 있는데 다시 대표회를 모은다고 하면 의정원을 부인하고 무시하는 것이라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본디 공화정이라는 것은, 중앙 기관은 국민의 여론에 복종하고 국민 각 개인은 그 중앙기관을 복종하는 시스템입니다. 중앙 기관이 국민의 여론을 따르려면 여론이라는 것이 먼저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여론은 각 방면의 대표가 모여 다수의 의사를 표시하기 전에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국민 여론을 성립시키기 위해 각 분야 대표가 모이는 것을 어떻게 의정원에 대한 부정이라고 하겠습니까.”

-국민대표회의는 말씀하신대로 중앙 기관인 임시정부가 올바른 국민 여론을 수렴할 수 있도록 각 분야 대표들 사이의 여론을 만들어내는 모임이었던 것이군요.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국민대표회의가 모였을 당시는 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성립된 이래 있어온 여러 가지 이견과 복잡한 문제들이 점차 심화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문제를 방치해두면 독립 운동에 크나큰 장애가 생길 것이니 이를 해결하고 시국을 정리하려면 각 방면 대표들이 모여 공론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시에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 외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라는 비판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 의혹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런 의혹을 제기하는 자들이 그때 있었지요. 내용인즉 이승만 대통령을 쫓아내려는 이동휘 총리나 상해 정부를 깨려는 원세훈(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선생이 안창호를 이용해서 자기네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니 속지 말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만약 그런 자들이 하는 말대로 이동휘 총리나 원세훈 선생이나 제가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지고 국민대표회의를 추진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후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을 때 모이는 각 방면 대표들이 모두 그들의 가족이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될 리는 없겠지요. 이 총리 등이 어떤 의사를 가졌든 국민대표회의는 각 방면에서 각종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의논하고 다수의 공론을 만들어내는 회의입니다. 어느 개인의 무슨 내막이 있다는 식으로 국민대표회의를 의심하는 것은 참 어리석고 못난 일입니다.

국민대표회의는 어느 개인이나 기관을 공격하거나 또는 반대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국민 대표들로 하여금 공론을 만들게 하고 아울러 각 방면에 흩어져 있는 대한 민족 전부의 자원과 힘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좀 더 큰 힘을 만들어내 우리의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국민대표회의를 이끄신 후인 1926년에는 다시 임시정부 최고 수반인 국무령에 선임되셨습니다. 물론 선생님 의사와 무관하게 선임되신 것이라 취임을 거부하셨지만, 이후에도 임시정부 발전을 위한 연설회도 꾸준히 하셨고 임시정부경제후원회라는 것을 이끄시기도 하셨지요. 당시 안팎에서는 창조파다 개조파다 하면서 노선 투쟁이 격해지면서 임시정부의 힘이 빠진 것도 사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끝까지 임시정부의 가능성을 높이 보신 겁니까.

“임시정부가 쇠약해지자 누구는 이걸 그대로 보존하여야 하냐며 걷어치우고 말자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누구는 임시정부 때문에 싸움만 한다고 없애 버리자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것은 임시정부 때문이 아닙니다. 임시정부를 탓하며 싸우는 자들은 정부가 없더라도 싸울 것입니다. 싸우는 이유가 정부 때문이 아니라 본인들의 투명하지 못한 마음에 있는 까닭입니다. 아이가 체하는 것은 밥의 죄가 아니고 밥을 잘못 먹은 죄입니다. 임시정부가 쇠약해진 것도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임시정부는 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부족한 것이 있으면 잘되도록 노력해야지 그저 버리자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임시정부는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기관입니다. 온 민족이 일어난 기미년 독립선언 당시 ‘조선은 독립국임을 선언함’ 그 말 한 마디에서 건설된 것이지 않습니까. 독립 운동의 전략 차원에서 봐서도 독립선언 이후 계속 유지해온 독립 운동의 구심점을 없애버린다고 하면 당시 본국에 있던 인민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외국에서도 한국의 임시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는데 그게 없어지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도 한때 임시정부는 조그마한 집의 세를 낼 돈이 없고 국무령을 할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만일 정말로 그런 이유로 임시정부가 없어졌다고 하면 우리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선생님께서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셨던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1945년 건국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입맛이 쓰실 것 같습니다.

“임시정부는 독립선언에서 시작되어 명분과 정의를 지닌 정부이고 처음부터 장차 서울에 세울 정부의 그림자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독립 운동가들의 구심점이었고 독립을 꿈꾸는 대한 사람들의 정부였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제가 알 길은 없습니다.”

-건국절 논란이 나온 김에 말씀드리자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적 성장에 원동력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때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당시에도 있던 일제의 간악한 논리입니다. 제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만났을 때 그 역시도 ‘일본은 한국의 제반 시설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며 짐짓 호의를 가진 척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더 생각할 것도 없는 기만입니다. 그 말대로 일본이 우호적인 이유로 우리나라에 왔다면 저부터가 통감부에 매일 찾아가 인사를 했을 것입니다. 혁신을 하더라도 대한의 혁신은 대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인이 일본에 와서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다면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당시 일제가 우리나라에 가장 잘 협조하는 길이 있었다면 그건 대한의 일을 대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당장 떠나는 것, 그뿐이었습니다.”(다음편에 계속..._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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