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공동 연출한 장 피에르 주네와 마르크 카로의 협업 영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1995)는 대놓고 프로이트를 명제로 던진다. 독신의 과학자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9명의 인간을 창조하지만 유전자가 꼬여 의도와 다르게 태어난다. 아내로 만든 비스무쓰는 난쟁이가 된다.

아들로 만든 여섯 쌍둥이는 잠꾸러기가 된다. 자신을 이을 천재 과학자로 만든 크랑크는 꿈을 꾸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으로 태어나자마자 늙은이가 되고, 친구로 만든 이르뱅은 미완성으로 뇌만 수족관을 떠다닌다. 과학자는 반항하는 크랑크와 몸싸움을 벌이다 비스무쓰의 가세로 바다에 버려진다.

그러나 죽지 않고 바닷속 은밀한 곳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인간 세상을 관찰하며 살아간다. 크랑크는 바다 한가운데에 요새를 건설하고 주변에 수뢰로 쉴드를 만든 뒤 피조물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한다. 그는 젊음을 되찾기 위해 아이들의 꿈을 훔치기로 작정하고 맹인들에게 눈을 선사한다.

그가 만든 옵타콘스란 장치는 맹인이 한쪽 눈으로나마 희미하게 세상의 윤곽을 볼 수 있다. 맹인 조직은 도시에서 아이들을 유괴해 크랑크에게 공급해 주는데 그 과정에서 차력사 원이 동생 삼은 댄레를 납치한다. 원은 만사를 제치고 댄레를 찾고자 발버둥치다 소매치기 소녀 미에트를 알게 된다.

미에트 등 아이들을 거둔 뒤 소매치기와 절도 등을 시켜온 샴쌍둥이 노파 옥토푸스는 도망친 미에트를 잡기 위해 예전에 서커스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독침 벼룩을 조종하는 마르첼로를 고용한다. 옥토푸스는 힘센 원은 잡아서 데려오되 미에트는 수장시키라고 주문하고 마르첼로는 벼룩을 푸는데.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업적이 무의식의 발견이라는 데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가 ‘꿈은 그 사람의 소망의 실현이자 무의식의 대용물’이라고 정의했듯 과학자는 외로움을 이겨내고 싶은 소망과 무의식을 근거로 창조했기에 9명의 피조물은 보편적이지 못한 외모 혹은 비뚤어진 내면을 갖춘다.

과학자는 실패한 창조주고, 그 패착은 크링크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크링크가 아이들의 꿈을 훔치려 하지만 악몽만 훔칠 뿐이다. 왜 그와 아이들의 뇌를 연결하면 악몽만 꾸는가? 그건 크링크 자체가 악몽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드(원시적 욕구, 무의식)는 꿈을 꾸고 싶다는 본능만 작용할 따름이다.

물론 그에게 에고(자아, 의식)가 없는 건 아니지만 슈퍼 에고(초자아)가 이드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 물론 결론적으로 과학자가 결자해지 하긴 하지만. 그런 면에서 크링크는 과학자의 이드, 즉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이기도 하다. 소년의 나이에 할아버지로 늙어버린 게 명확한 증거.

그렇다면 이르뱅은 당연히 초자아다. 다만 뇌밖에 없기에 생각은 올곧지만 행동할 수가 없다. 원과 미에트는 그 대리 집행자다. 원의 나이가 어리다는 지적에 미에트는 “생각보다 어리지 않아”라고 뇌까린다. 또 “몸은 크지만 애인지도 모르고, 작지만 어른인지도 몰라”라고 의미심장한 명제를 던진다.

마치 사이비교 교주 같은 맹인의 지도자 가브리엘은 “제3의 눈을 통해 허상의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설교한다. 맹인은 그릇된 가치관으로 세상을 왜곡되게 바라보는 다수의 현대인을 은유한다. 그들은 범죄(자본)를 통해 눈을 뜨지만 그 제3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고 일그러져있다.

수미상관으로 배치된 크리스마스 밤에 심벌 치는 인형을 바라보는 소년은 크링크 혹은 과학자다. 과학자는 크링크와 싸우고 바다에 던져질 때 뇌를 다쳐 기억을 잃었다. 그런데 이르뱅의 메시지를 받고 기억을 되찾아 잘못된 걸 바로잡기 위해 세상에 나온다. 미에트도 그 메시지로 깨달음을 얻는다.

원의 본래 직업은 포경 작살잡이였다. 그러나 어느 날 고래의 노래를 들은 후부터는 작살이 자꾸 빗나가 해고됐다. 미에트는 바다에 빠져 죽을 운명 앞에서 “원래 시궁창 출신이니 당연해”라고 말한다. 자연의 질서를 흩트리지 않으려는 아름다운 자연주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숙명론이자 기계론이다.

미에트의 눈물 한 방울이 연쇄작용을 초래해 엄청난 나비효과를 낳는 아이디어는 재기 발랄하다. “아무리 위대한 정신도 고독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다”는 대사는 현대인의 외로움을 통렬하게 대변한다. 단레가 피랍된 상황에서도 아무런 생각 없이 계속 음식을 먹어대는 시퀀스는 그 메시지의 연장이다.

미에트가 크링크의 아지트에 숨어들어갈 때 원은 자신의 니트의 올을 풀러 그녀의 몸에 묶는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다. 과학자는 마지막 해결사가 되는 순간에 “무는 무한하다”고 절규한다. 동양적 무위자연 사상. 미에트와 단레를 친형제로 받아들이는 원이야말로 하나(창조주)의 존재가 아닐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헬보이’ 1, 2편에서 타이틀롤을 맡았던 론 펄먼의 풋풋하던 시절의 모습이 인상적이고, 무려 1인 7역을 해낸 도미니크 피뇽의 연기 솜씨가 명불허전이다. 어머니의 양수를 상징하는 바다가 오염돼있고 도시 역시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그리지만 따뜻한 인간도 많다.

어른들은 탐욕으로 정신세계가 피폐해져 판단 능력을 상실해 아이처럼 철이 없고, 아이들은 그 험한 세상에서 일찍 눈을 떠 어른 이상으로 영악해졌거나(소매치기 아이들) 미에트처럼 올바른 인식론을 갖추고 정의를 추구한다. 당연한 듯 이 영화는 꿈의 소중함을 설파한다. 잠자는 꿈과 희망 모두를.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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