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의 강점은 36년간 이어졌습니다. 보통 말하는 그 기간은 1910년 강제 합방부터 시작해서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를 말하는 것인데요, 사실상 국권을 빼앗긴 기간은 더 길다고 봐야겠지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1907년에는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를 당했고 군대도 해산됐으니 말입니다. 한 세대가 훨씬 넘는 기간인데 그 기간 내내 독립에 대한 확신을 꺾지 않으신 점은 존경스럽습니다.

“당연한 사실을 믿고,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지, 그런 것을 존경스럽다고 하면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하하,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분들도 많았던 게 사실이지 않나요. 시인 서정주 선생은 해방 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나와서 “해방이 이렇게 빨리 될 줄 몰랐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몇 년 전 폭발적 인기를 누린 ‘암살’이란 영화에도 독립군 동지들을 배신하고 친일파로 활동한 인물이 반민특위에 나와서 똑같은 말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몰랐으니까! 이렇게 빨리 해방이 될 줄 알았겠나!”라고요. 그 어려운 시기에 독립에 대한 신념을 어떻게 끝까지 지키실 수 있었던 겁니까?

“지금 대한민국의 사는 후손들이 100년 전 일을 더듬어볼라고 하면 당시 선조들의 감정이랄까요 처지랄까요, 그런 것들을 오롯이 느끼고 알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때 대한의 국민들이라면 누구든 독립과 자유를 원치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독립 운동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기왕에 독립 운동에 뛰어든 사람이라도 위기를 겪으면 독립 운동을 계속 할까 말까 고민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이 독립과 자유를 원치 않아서 생기는 것들은 분명 아닐 겁니다. 독립 운동이 성공할지 아닐지에 대한 의심과 걱정에서 그런 고민이 생긴 것뿐입니다.

얼핏 보면 당시 우리나라는 인재도 적고 재력도 없고 기타 다른 것들도 넉넉한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이래서야 독립 운동을 성공할 수 있을까 의심이 생길 만도 했지요. 그러나 저와 동지들은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독립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보든지 독립할 자격을 충분히 갖춘 민족이었습니다. 결코 이민족의 노예 생활을 오래할 민족이 아니라는 겁니다. 후손들께서도 역사를 배우셨으니 아실 겁니다.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내부에서는 계속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대외 형세도 결코 일본에게 유리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성을 보든지 국제 정세로 보든지 우리가 독립하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할 여지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는 이에게 누군가가 독립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겠지요. 자기의 의무도 다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승만이든 이동휘든 아니면 안창호를 비롯한 그 누군들 어떻게 혼자서 독립을 가져다가 안겨주겠습니까. 그러니 끊임없이 우리의 처지를 살피고 그에 맞는 합당한 방침과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밟아 나아가려는 노력, 말도 안 되는 요행과 우연을 믿지 않고 꿋꿋하게 할 일을 해나가는 것 말고 달리 길이 없었던 것이지요.”

-대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독립을 할 것이라고 믿고 대한의 독립을 위해 꿋꿋하게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이네요.

“대한의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영국의 일은 영국 사람이 하고 미국의 일은 미국 사람이 하듯 대한의 일은 당연히 대한의 사람이 해야 합니다.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한의 일이 잘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을 대통령이나 정부에만 책임을 지우고 자기는 아무 책임이 없는 줄 압니다. 이는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모르는 사람이요,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결단코 대한의 일에 대해 의식 없는 태도로 방관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능력껏 하루하루를 노력하는 자가 책임감 있는 대한의 국민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미년 독립선언서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도 살아 있지 말고 다 죽자는 뜻이 아닙니다. 독립을 위해 일하다가 하나도 죽어도 둘이 죽어도 끝내 모두 피를 흘리더라도 그때까지 노력하자는 뜻입니다. 오늘 안 되면 내일에 올해 안 되면 내년에, 그렇게 1년, 2년, 10년, 20년, 언제까지든 독립이 완성되는 날까지 쉬지 말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줄로 확실히 믿으면 조금도 비관은 없을 것이요 낙관할 것입니다. 옳은 목적을 세운 자는 일시적으로 실패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성공하고야 맙니다. 옳은 목적을 세운 사람이 실패했다면 그것은 목적을 향해가다 장애와 곤란을 만났을 때 목적에 대해 비관을 했기 때문입니다. 목적에 대한 비관이란 곧 그 세운 목적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세운 옳은 목적에 대해 일시로 어떠한 실패와 장해가 오더라도 조금도 그 성공을 의심치 않고 낙관적으로 끝까지 붙들고 나아가는 자는 확실히 성공합니다.”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대한민국이 독립한 것처럼 말이지요.

“네, 그렇다고 해야지요.”

-그래도 그런 강인한 의지를 오래도록 지니기는 쉽지가 않지요. 우리는 독립을 하는 게 당연한 민족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당시에 식민지로 추락한 원인은 뭐라고 보십니까?

“우리가 일시 불행한 경우에 처하여진 것은 다만 구미의 문화를 남보다 늦게 수입한 까닭입니다. 우리 민족은 근본이 우수한 민족입니다. 일본으로 말하면 구미와 교통하는 아시아 첫 어귀에 처하였으므로 구미와 먼저 교통이 되어 우리보다 신문화를 일찍 받게 되었고, 중국은 아시아 가운데 큰 국토를 점령하였으므로 구미 각국이 중국과 교통하기를 먼저 주력한 까닭에 또한 신문화를 먼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경우도 아니었고 동아시아에 신문화가 처음 들어올 때 정권을 잡았던 자들이 몽매(蒙昧)중에 있었으므로 신문화가 들어옴이 늦어졌습니다. 우리가 일본이나 중국에 구미 문화가 들어올 때 같이 받았더라면 우리 민족이 일본이나 중국 민족보다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근본이 우수한 우리 민족이 이런 불행한 경우에 처하여 남들이 열등의 민족으로 오해를 하니 스스로 분하고 서로 측은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훌륭하신 독립운동가들께서도 죽는 순간까지 독립을 꿈꾸며 쉬지 않고 노력하셨지만 대부분은 해방의 순간을 몸소 보지 못하셨습니다. 사실 후손들 입장에서 해방 이후의 혼란과 친일 청산 과정, 나라와 민족이 분단되는 과정, 이후의 현대사의 갈등 등을 생각하면 독립운동가 선조들에게 참 부끄럽지만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옥고를 당하시다 결국은 직접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는 못하셨지요. 그런 점이 안타깝지는 않으십니까.

“기자 선생께서는 독립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후손의 한 명으로서 어디에 비할 바 없이 훌륭한 그리고 한없이 고마운 일이지요.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제가 지금 이 공원에 앉아 한국어로 인터뷰를 하고 한글로 글을 쓰는 일도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제 이름도 달랐을 것이고 아마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도 선생님과 많이 달랐겠지요.

“그렇게 평가하시니 고마운 말씀입니다. 기미년 독립선언 이후에 국내외에서는 많은 동포들이 들고일어났다가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욕을 보고 붉은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거나 끊었습니다. 그렇게 독립 운동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참으로 장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같이 운동을 한 당시에 곧 독립을 얻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 순간 그렇게 피 흘리며 독립 운동을 한 까닭에 앞날에 언젠가는 큰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특별한 성적이 당장에 없다고 후회할 일은 없었습니다.”(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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