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청샤오둥, 탕지리 공동 감독의 영화 ‘동방불패’(1992)는 많은 관객들이 홍콩 무협영화 중 걸작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작품 중 하나다. 진융의 무협소설 ‘소오강호’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1990)의 속편으로 제작돼 엄청난 세계관과 인생관을 펼치면서 이원론(이항대립)의 정수를 보여준다.

1595년. 패권 다툼으로 정국이 어지러워진 일본의 닌자와 무인 등 여럿이 명나라 남쪽 해안가에 정착한다. 한족에게 피해의식이 강한 묘족의 리더 임아행은 일월신교라는 마교를 설립하지만 의동생 동방불패(린칭샤)의 쿠데타로 투옥되고, 딸 영영(관즈린)은 심복 남봉황과 도주해 복권을 도모한다.

독고구검을 익힌 화산파 수제자 임호충(리롄제)은 천하비급 규화보전을 통해 권력을 쥐려는 장문인에게 실망해 악령산(리자신) 등 사제들과 강호를 떠나 우배산에 들어가 속세와 연을 끊으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영영의 요청을 외면하지 못하고 은신처에서 그녀를 만나 돕기로 약조한다.

규화보전을 익힘에 따라 여성화된 동방불패는 우연히 호충을 만나 호감을 품게 된다. 동방불패의 정체를 모르는 호충은 그녀를 일본 여자로 오인하고 돕다가 우여곡절 끝에 그녀의 닌자 부하에게 잡혀 투옥된다. 정신을 차린 그는 맞은편 감방에 아행이 있는 것을 알고 기지를 발휘해 함께 탈옥한다.

아행은 영영을 통해 세력을 규합한 뒤 호충에게 함께 동방불패를 없애고 천하를 제패하자고 제안하지만 호충은 그에게 실망해 술 한잔할 요량으로 동방불패를 찾아간다. 동방불패는 애첩 시시를 자신인 척 속여 호충의 방에 들여보낸다. 호충을 미행하던 봉황은 동방불패의 독침을 맞고 도주한다.

규화보전은 수백 년 전 환관이 창시한 초인적인 무공을 담은 비급으로 아행에게 있었는데 그는 동방불패를 차기 후계자로 미리 선포한 뒤 규화보전을 나눠 갖는다. 권력이 보장된 동방불패는 그럼에도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에 올라 한족을 무찌르고 묘족 천하를 세우고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규화보전은 내시가 만든 만큼 거세를 해야 배울 수 있고 무공을 완성하면 남성성이 사라진다. 그리스 신화에서 태초의 인간은 막강한 힘을 지닌 자웅동체라 신의 영역을 위협했다. 그러자 분노한 제우스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갈라놓았고 그래서 인간은 평생을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의 ‘향연’에도 나온다. 그리스 신화 속 여성 카이니스는 해신 포세이돈의 의해 남성이 된 후 영생불사의 능력을 얻는다. 그러나 거만해진 그는 신의 자리에 오르려다가 제우스의 명령을 받은 켄타우로스에 의해 타르타로스(지옥)에 산 채로 묻힌 뒤 여자로 돌아가 모든 능력을 상실한다.

이처럼 성별을 초월한 사람만이 신에게 근접할 수 있다는 신화와 전설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아행은 규화보전을 완성한 동방불패를 대놓고 비웃는다. 그는 규화보전의 불행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자신이 익히지 않고 동방불패에게 귀띔한 것이다. 원래 동방불패는 애첩 시시를 사랑했었다.

하지만 규화보전이 완성될 무렵 순진무구한 호충을 알게 됐고, 여성성이 앞선 그는 어느덧 호충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융은 남자의 무의식의 구조를 구성하는 여성적 심상(진정한 자아)을 아니마로, 여성의 그것을 아니무스로 각각 정의했다. 그림자, 자기와 함께 네 가지 주요 기본 원형을 완성한다.

융은 ‘아니마가 발달한 남성은 부드럽고 인내심이 강하며, 타인에의 이해와 배려 그리고 동정심이 앞서지만 아니마를 억압하면 허영심과 변덕이 커진다고, 아니무스를 억압한 여성은 호전적이고 둔감해지지만 균형 있게 발달시키면 적극적이고 강인한 성격에 이성적인 인격을 갖추게 된다’고 했다.

원래 이기적이었던 동방불패는 규화보전으로 인해 여성화되자 권력욕보다는 진정으로 묘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뿐만 아니라 순수한 호충에 대한 배려심까지 갖추게 된다. 하지만 아니마를 무시한 아행은 오로지 권력욕에 눈이 멀어 부하들을 숙청하고 자신을 구하고 도와준 호충까지 죽이려 든다.

남자들 틈에서 자란 령산은 남자처럼 행동하지만 호충에 대한 연정을 계기로 아니무스를 해방시킴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발견해 여성적 정체성을 정립한다. 그래서 그녀는 봉황을 살리고자 안간힘을 쓸 만큼 강인해지고, 연적 영영을 도울 만큼 이성적으로 변한다. 소오강호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화산파 제자들은 틈만 나면 ‘소오강호’의 주제곡 ‘사해일성소’를 부른다. 소오강호는 부와 권력을 잡으려고 이전투구하는 세상을 비웃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호충 일행은 강호를 떠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행은 “인간이 강호인데 어떻게 강호를 떠나?”라고 충고한다. 아행은 또 다른 동방불패였던 것.

선과 악, 공존과 독존의 경계를 묻는 이원론이 두드러지는 철학! 인생무상, 일장춘몽이란 테제까지도! 애주가인 호충은 낭만주의자다. 충분히 권력을 쥘 수 있을 만한 환경과 조건에서도 그는 미련 없이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하는 무위자연의 삶을 꿈꾼다. 자연법을 따르는 자연주의, 자유주의 사상.

동방불패의 방의 갓등 안에서 나비가 퍼덕이는 장면이 수시로 등장하는 건 ‘장자’의 호접몽론이자 인생무상이란 메시지다. 령산은 죽은 애마에게 “사람으로 환생해”라고 기도하지만 호충은 “사람으로 태어나면 더 힘들다”고 말한다. 결말은 공교롭게도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2000)이 매우 유비적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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