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인터뷰 내내 너무 무거운 주제만 다룬 게 아닌가 싶습니다. 주제를 조금 돌려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걸어온 발자취를 한 번 훑어보죠. 우선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독립운동가의 길, 언제부터였던 것 같습니까?

“글쎄요, 분명히 언제부터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허허, 태어나기를 평안남도 강서군에 봉상도라고 하는 시골 섬마을에서 났으니 구식 서당 교육을 받고 넓은 세상을 볼 기회도 그다지 없었습니다. 그러다 서당 선배로 신학문을 많이 접했던 필대은 형 덕분에 서울구경도 하고 서울 정동 구세학당(언더우드학당)에서 신학문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차차 힘없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깨달으면서 독립에 대한 관심도 커간 것 같습니다.

후손들은 선조들의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아마 일제로부터의 독립, 곧 해방을 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독립이란 말은 일제가 대한을 병탄하기 전부터 널리 쓰였던 말입니다. 독립은 일제뿐 아니라 청국(청나라)과 아국(러시아)을 비롯한 주변 열강들로부터의 자주독립이란 의미였습니다. 내가 19살이던 해(1897년)에 서재필 선생의 시국강연에 감동을 받고 독립협회 활동을 시작했으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이란 단어와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해에 필대은 선생과 함께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창립하셨지요. 그리고 같은 해 음력 7월에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셨고, 그 자리에서 연설을 하시면서 일약 전국적인 명사가 되셨습니다.

“너무 과한 칭찬을 하십니다. 그때 청일전쟁이니 외세의 침투니 하는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생겼을 때였고 또 혈기왕성한 청년 시기이다보니 열성을 가지고 연설을 했지만 치기(稚氣)가 가득했을 겁니다.”

-선생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그때 연설을 곁에서 들었던 사람들이 훗날에 평가를 남긴 게 있습니다. 그 평가를 보면 선생님께서는 ‘고성을 지르거나 탁자를 내리치거나 팔을 뽑아내지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연설을 했는데도 청중들인 저절로 만세를 높이 불렀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귀국하신 직후인 1907년에 하셨던 ‘삼선평 연설’을 들었던 함석헌 선생도 ‘커다란 무엇이 조수처럼 휩쓰는 폭풍처럼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동지들도 과한 칭찬을 했었군요. 당시에 저는 제가 하고싶은 말을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때 행사에는 평양감사와 친위대장을 비롯한 지역 관리들도 전부 참석했는데 저는 단상에 앉은 고관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그들의 실정을 규탄하고 나름대로 생각한 새롭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관리들의 실정에 괴로워하던 인민들이 그 점을 시원하게 여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다음편에 계속...)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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