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지루하고 고달픈 일상을 견디거나 아이의 울음 때문에 단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사랑 아니라면 가능할까? 손만 뻗으면 즐길 수 있는 각종 향락을 외면하고 지저분한 오물 속에서 땀을 흘리는 이유를 사랑 아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사랑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다. 사랑 때문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나의 모습을 버려야 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미처 몰랐던 나의 모습을 되찾을 수도 있다.

이 모두 사랑이 아니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내가 사랑을 선택한 줄 알았는데, 그 사랑 때문에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아마 어떤 이는 차라리 동면 상태에서 죽는 줄도 모르는 채로 죽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충분히 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미처 부화하지도 못한 채 고치 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을까? 그보다는 피할 수 없이 죽을 운명이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삶이지 않을까?

그리고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사랑’ 외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결국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죽음과도 다름없는 삶에 갇히지 않고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또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이유이지 않을까? 그래서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축복이다.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목적지 도착을 앞두고 먼저 깨어난 승무원들이 우주선 한편에서 발견한 것은 (우주선에는 어울리지 않은) 울창한 숲과 작은 오두막, 그리고 작가였던 여자가 남긴 자신들에 관한 기록이었다. 그 숲과 오두막은 남자가 여자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언젠가는 죽을 운명이지만 우연 또는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렇게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그들만의 세상에서 최초의 또는 최후의 아담과 이브로 살게 된다.

그런데 사랑은, 영화에서처럼 우주의 미아 같은 존재가 서로를 만나 함께 만들어가는 아름답고 신비한 삶이기만 할까? 그보다는 어쩌다 내가 좋아한 것으로 상대의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리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나 역시 상대와 운명을 뒤섞게 되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고 또 삶이지 않을까?

우리들 대부분은 이처럼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누구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이처럼 거창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태어나서 살다 보니 사랑하게도 되고 또 미워하게도 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귀한 존재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의 삶은 이전과는 아주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잠시 경험한 사랑만으로 우리가 고결해지고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 모두 애초부터 그렇게 완성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사랑이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사랑의 자세를 통해서 사랑의 완성된 모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씻기지 않을 것 같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분노와 후회를 겪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의 의미가 퇴색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랑은 바람둥이처럼 여러 번 반복한다고 해서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 한 번의 사랑이라도 얼마나 오래도록 지키고 헌신하는가에 따라서 그 진실성을 가늠할 수 있다.

삶은 그리고 사랑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에게 베푸는 축복이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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