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 출처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김문 작가)

-도산이라는 호가 하와이를 뜻한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도산은 후손들에게도 워낙 유명한 호라서 뭔가 훌륭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허허허, 호라는 것이 편히 부르는 별명 같은 것인데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여 짓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스물네 살쯤이군요. 아내와 결혼을 하고 그 다음날 바로 선진 문물과 학문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아내와 같이 미국행 배에 올랐습니다. 배를 타고 한 달여를 가는 여정이니 혈기왕성하던 청년 시절이라도 힘들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 여러 날 항해 끝에 하와이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하와이의 모습을 보고는 감흥을 받아 도산(島山)이란 호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에 가셔서 공부만 하신 것은 아니었지요. 가사도우미로 일하시면서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다시 배우고 교민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청소를 해주는 등 생활 개선 운동을 하셨습니다. 한인친목회, 공립협회 등 교민 단체를 결성하고 공립신보도 펴내셨지요. 지금은 미주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에 우리 동포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재외동포 700만 명 시대가 열렸다고 하더군요. 교민 공동체를 처음으로 결성해 지금의 교민 사회 기반을 만드신 게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아, 교민 공동체를 제가 처음 만들었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우리 동포들이 모여 있는 곳은 당연히 교민 공동체가 있다고 해야겠지요. 공동체라는 게 꼭 눈에 보이는 회합이나 이름이 분명한 단체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교민 단체를 처음 만들었다고 평가하신다면 작은 힘을 보탰다 정도로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미국의 공립협회만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미국행을 하셨을 때는 북미, 하와이, 러시아 시베리아, 중국 만주 지역의 교민 단체까지 아울러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도 설립하셨습니다. 4개 지역의 지방총회를 총괄 운영하는 기관이었지요. 대한인국민회 시절은 어땠습니까?

“다들 아시다시피 일제 강점기에 국내 상황은 순검과 정탐꾼, 탐보원이 사면에 거미줄 벌리듯 하고 있었습니다. 대한 사람들은 누구든 뜻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으니 본국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어디 뭔가 원동력을 발휘할 틈이 쉽게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교민들에게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우리 미주에 있는 한인들은 자유로 행동할 수 있고, 자유로 말할 수 있으니 원동력을 발하고자 하면 못할 까닭이 없다. 우리 미주 사람들이 원동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이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버리고 돕지 않으면 어느 누가 우리를 도와주겠는가’라고 말입니다. 대한인국민회는 작은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회원 하나하나가 국가에 대해 큰 책임 있으니 마땅히 우리 몸을 버려서라도 국가를 중흥케 하자는 것, 그게 저의 생각이었고 또 회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해외에 있는 교민들은 아무래도 본국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처지가 나으니 더욱 독립에 힘써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물론 미주의 동포들도 불쌍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0년을 봇짐을 지고 동서로 떠다니며 오늘은 이 농장, 내일은 저 농장을 전전하는 처지였지요. 한인 농업이 발전을 이룬 때도 있었지만 사업으로 큰 재산을 모은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또 배워서 나중에 쓰든 못쓰든 사람은 학문을 해야 하는 겁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10년 노동에 학문의 재미를 언제 느낄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무엇보다 나라 없는 설움을 어디다 비하겠습니까. 나라가 없으면 교민들의 자유도 없습니다. 제가 멕시코에 다녀올 때 일이었습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이민국 관리가 묻기를 ‘네가 중국 사람이냐’하니 ‘아니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러면 일본인이냐’라고 해서 ‘아니오’라고 했지요. 그리고 ‘나는 대한인’이라고 하니 심히 거북한 말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입국을 못해 여러 날을 허비하다가 끝내 제 신분과 이력을 증거로 내놓은 뒤에야 입국을 허락했습니다.

높은 지식을 가진 자도 자기 나라라면 기뻐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자도 자기 나라라면 기뻐하며 불량한 무리나 주정뱅이, 노름꾼이라도 자기 나라라고 하면 엉덩이춤을 추며 그저 기뻐하는 것입니다. 미주의 동포들은 그런 모든 기쁨을 모르고 지냈으니 그 설움이 어떠했겠습니까.”

-타향살이의 설움도 컸을 텐데 국권을 잃었다는 소식도 미국에서 들으셨지요. 그때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저도 선진 교육과 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기독교의 나라인 미국을 처음에는 신임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즈음 열린 포츠머스 회의 등 국제회의나 열강들의 외교 회담을 보노라니 결국 대한을 책임질 사람들은 대한인뿐이라는 생각이 짙어졌었지요. ‘한반도의 험악한 풍운을 헤치고 반도강산을 다시 빛나게 할 사람은 오직 대한의 청년들뿐이다. 그들이 그 책임을 질 것이요, 나도 대한의 청년 중 한 사람이다’ 이게 저의 다짐이었습니다.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는 공립협회 회원들과 이를 반대하는 시위도 벌였지만 큰 성과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 힘든 시절을 이겨낸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안정된 생활을 하거나 재산 불리는 재미, 학문하는 재미도 없고 무엇보다 나라를 잃어 자유까지 잃고 고된 노동만이 전부였는데 말입니다.

“희망입니다.”

-희망이요? 독립에 대한 희망 말씀이신가요.

“독립을 포함해서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질 것이란 희망 말입니다. 교민들은 희망이 아니면 다시 기쁨을 느낄 방법이 없었습니다.

희망이 뭡니까. 희망은 장차 무엇인가 얻을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 끼를 굶은 자는 내일 풍족히 먹을 것을 생각하고 삼동 추위에 헐벗은 자는 내일 따뜻한 옷을 입기를 생각하면 우선 마음의 위안을 얻으면서 차마 생명을 끊지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일본인에게 학살을 당하지만 내일은 우리가 더 힘을 얻어 일본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 그게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은 거저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요. 희망은 절대적인 용맹과 절대적인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후손 여러분들도 오늘부터 희망을 가지고 내일의 거울을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선 얼굴이 좋아지고 허리도 차차 펴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슴 속에 쌓여 있던 슬픔이 풀려 나가고 기쁨이 들어와서 그 자리를 채우고 세상과 싸워나갈 힘을 줄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어깃장을 놓는 것 같지만 한 말씀을 더 드린다면 희망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어떻게 그리 많겠습니까?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보다 당연히 희망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게 생산적일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굳건한 희망만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나도 하나 덧붙여 말해야겠습니다. 희망을 실현할 때는 나약한 의심을 깨버려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우리가 정말 독립이 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거나 ‘우리가 독립한다는 말은 모두 헛소리’라고 떠드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남부러울 것 없는 독립 국가로 멀쩡히 남아있지 않습니까. 여기 복숭아 씨앗이 둘 있는데 하나는 10년 전에 심어 열매를 맺었고, 다른 하나는 1년 전에 심어 이제 겨우 뿌리를 박아 아직 꽃도 피지 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직 꽃도 피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라고 해서 1년이 된 것을 베어 버릴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민족은 우수한 성정(性情)을 지녔습니다. 나약한 의심을 깨고 희망을 가지고 노력해 나가면 본래 좋은 성정이 발휘돼 그 누구보다 앞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