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오는 24일 개봉될 ‘그레텔과 헨젤’(오즈 퍼킨스 감독)은 상업적 블록버스터 위주의 메뉴에 지칠 법한 컬트 마니아들에게 단비와도 같은 미스터리 스릴러다. 그림 형제의 ‘헨젤과 그레텔’을 완전히 뒤집었지만 외려 원작자의 호러적 의도를 간파한 ‘신의 한 수’처럼 느껴질 만큼 강렬한 임팩트를 준다.

먼 옛날에 분홍 모자를 쓴 예쁜 소녀가 있었다는 동화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소녀가 병에 걸리자 엄마는 고쳐 달라고 어둠의 마법을 쓰는 마녀에게 데려간다. 마녀는 병을 고쳐줄 뿐만 아니라 예지력이라는 선물까지 준다. 소녀가 보는 사람들의 미래는 당연하겠지만 모두 절망적인 죽음일 따름.

그러자 아버지가 자신을 희생하고 엄마는 소녀를 마법의 숲으로 보낸다. 이 동화를 잘 알고 있는 소녀 그레텔은 아버지가 없고 엄마가 생계를 책임지니 찢어지게 가난하다. 그래서 부자 스트립 씨의 집에 가사도우미 면접을 보러 가지만 자신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고 군림하려 들자 뛰쳐나온다.

집에 오니 엄마는 “이 집은 죽은 혼령으로 가득 차 너무 좁으니 동생을 데리고 나가라”며 도끼를 휘두른다. 놀란 그레텔은 헨젤을 데리고 집을 나와 전에 달걀을 주며 친절을 베풀었던 헤이즈 아줌마의 집으로 간다. 텅 빈 그곳에서 잠을 청하려는데 갑자기 괴물 같은 사내가 공격해 도망을 친다.

괴한에게 당할 뻔한 순간 사냥꾼이 나타나 구해준다. 그는 토끼 고기를 대접하고 하루 재워준 뒤 산지기를 만나 의탁하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산지기를 만나러 산속으로 들어간 남매는 한 오두막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 홀다를 만나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기로 하는데.

원작의 초판에서 남매를 숲속에 버리는 인물은 친엄마다. 아이들의 정서를 고려해 계모로 바꾼 것. 그림 형제의 의도는 아름다운 동화라기보다는 ‘잔혹동화’에 가깝다는 느낌이 짙다. 이 영화는 내내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어두운 그림으로 전개된다. 음향 효과와 비주얼, 그리고 상징성이 월등하다.

그레텔은 스트립과 대화할 때 자신들의 가난이 주교에게 지나치게 많은 제물을 바쳐야 하는 제도에 원인이 있다고 당당하게 외친다. 스트립은 자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라고 주문하며 “순결은 지켰냐?”고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레텔을 누나와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부터 철저한 페미니즘 영화다.

집엔 아이들이 없는데 미끄럼틀이 있고, 가축이 없고 홀다가 장을 보는 것도 아닌데 매끼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그레텔은 이곳에 온 후 매일 밤 악몽을 꾸거나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홀다는 고서에 적힌 비법으로 자주 약을 지어 그레텔에게 먹이고 그레텔은 찬장 벽 너머 의문의 고리를 발견한다.

오두막에 정착하기 전 헨젤은 수시로 배가 고프다고 타령을 했다. 오두막에선 처음엔 행복해했지만 차차 음식 먹는 걸 꺼리게 된다. 남매는 서로 돼지라고 놀리거나 돼지 소리를 내며 이마를 비빈다. 그들은 오두막에 오기 전 허기를 달래려 버섯을 먹고 이유 없이 웃더니 환각에 빠지기까지 했었다.

그레텔은 사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버섯에게 묻고 허락을 받은 뒤 먹은 것이다. 즉 독버섯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두막에서의 진수성찬이 사실 마법인 것처럼 식탐은 결코 지적이지 못하다. 인간의 모든 오류는 식욕에서 비롯된다는 교훈. 배가 부르면 또 다른 욕심이 생긴다.

나무에 걸친 작은 신발들, 집에서 나는 냄새들, 다면의 거울, 도끼 등 다양한 상징들이 떡밥처럼 널렸는데 특히 펜타그램과 전시안(섭리의 눈)을 노골적으로 부각시킨다. 시작부터 삼각형이 돋보이는데 그건 기독교의 삼위일체이자 개념, 지시, 상징의 조화다. 전시안은 태양 혹은 이신론자를 의미한다.

이신론은 유일신과 천지창조론은 믿지만 창조 이후 신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론으로 무장한 전통 기독교의 대체 신앙이다. 펜타그램은 정오각성일 경우 예수의 오성 등의 종교적 힘이지만 역오각성이 되면 악마적 힘이 된다. 마녀라는 부정적 인식부터 마녀를 사냥하는 게 옳은 것일까?

이 작품은 사회적, 국가적 체제가 만든 빈부의 격차로 인한 가정의 붕괴에 주목한다. 죽은 조상들은 천당이든 지옥이든 가야 하지만 그곳도 열악해 떠나지 않고 집에 머묾으로써 후손에게 민폐를 끼친다. 무능함을 통감한 아버지는 스스로 생을 끝마치고, 위기의식에 휩싸인 엄마는 자식을 내쫓는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했다. ‘구토’를 통해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를 부정한 채 우연한 탄생이지만 필연적인 실존주의를 외쳤다. 그레텔은 다분히 사르트르가 모델이다. 분홍 모자 소녀와 홀다와 그레텔은 각자 다른 ‘사람’이지만 어떤 면에선 같은 ‘종’이라고 할 수도 있다.

헨젤은 “하루 종일 뭐해?”라고 묻고 그레텔은 “이것저것 배워”라고 답한다. “뭐가 무서워?”라는 헨젤의 질문에 그레텔은 “내 능력”이라고 응한다. 홀다는 갑자기 “대자연이 부르면 가야지”라고 외출을 하며 그레텔에게 “차 한 잔 끓여 놔”라고 주문한다. 홀다는 자신과 그레텔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멈출 수 없는 건 시작하는 게 아냐”, “소심한 사람은 자기 운명도 모른 채 보이는 것만 믿어”, “독을 먹어야 면역력이 생기지”. “용감하게 맞서면 안 될 일이 없다” 등의 교훈적인 잠언들이 향연을 펼친다. 결국 마무리는 자유다. 그레텔은 헨젤에게 “네 얘기가 널 인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2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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