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김승환의 행복한 교육] “아버지, 우리도 애완동물 키우면 안돼요?”라고 아이들이 물었을 때, 필자는 공중 부양된 아파트 말고 언젠가 마당이 있는 집에 가서 꼭 함께 키우자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다 의도하지 않게 아이들과 함께 햄스터 한 마리를 분양 받아 키운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에게 햄스터는 정말 귀엽고 깜찍한 새로운 친구였습니다. 그를 “보올이”라고 명명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이 작은 생명체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햄스터를 두 손으로 포근히 안고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생명에 대한 소중함, 그리고 살아 있다는 울림이 어떤 것인가를 어렴풋이 느끼게 해줍니다. 어떤 비단 이불보다도 부드러운 털, 해바라기씨 등의 견과류를 까먹으며 쳇바퀴를 한 없이 돌리는 모습을 보며 함께 즐거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로부터 다시 수 년 후에 이 번에는 햄스터보다도 훨씬 큰 고양이 한 마리를 분양 받아 키우게 될 기회가 생겼습니다. 행운아란 의미의 “로또”라고 불렸던 이 고양이는 새로운 집을 찾아가기 전 약 2개월간 필자의 집에서 동고동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소소한 즐거움을 위해서 반려 동물이 옷을 입어야 한다거나, 성대 수술, 중성화 수술 등을 해야 하는 것은 학대의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했기에 애완 동물을 집에서 키우는 것을 매우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아이들과 아내의 간절한 요구를 쉽게 뿌리 칠 수는 없었습니다.

드디어 아파트라는 거주 공간에서 사람들과 반려 동물의 동고동락이 시작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일과를 마치고 맨 처음 집으로 돌아온 누구라도 “보올이”와 “로또”를 만나면 대답을 할 수 없는 그들에게 항상 먼저 말을 걸며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잘 지냈어?”, “내가 보고 싶었지?”, “밥 먹었어?” 등등… 그들이 비록 사람의 언어로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끊임없이 그들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시도 하려고 했습니다. 햄스터 ‘보올이’, 고양이 “로또”와 공존 공생했던 짧은 시간 동안 필자는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이 왜 애완동물을 키우며 좋아하는 지 그 이유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너무 비약적인 확대 해석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분도 많겠지만, 외관상의 귀여움 등은 차치하고 제가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묵묵부답”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반려 동물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뛰어난 “경청”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비밀이 지켜지고 그저 듣기만 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주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상대방의 말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것이 경청의 기본이라는 가치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보면, 애완 동물들처럼 그저 잘 들어주는 것 만으로도 정서적 소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저에게 나름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가끔씩 밥상머리에서 우리 아이들로부터 가족간의 대화가 어려운 다른 친구들의 사례들을 전해 듣습니다. 부모님과 대화가 안된다는 소위 중2병이 있는 친구들,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그들과 대화가 어렵다는 우리 어른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 볼 여지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아이들이 들려주는 일상적인 얘기를 정말 경청했던가?’
‘뜬금없이 쓸데 없는 짓 말고 공부하라는 말 이외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알고 대화한 적은 있었던가?’

각박하게 사는 세상에서 소통할 일이 그다지 없는 많은 사람들의 말 벗 상대가 반려동물이 되어가는 웃픈* 현실을 이제는 인정할 수 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들보다도 오히려 사람들의 말을 공감해 주지 않는 것은 아닌 지, 오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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