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0. 7. 4.(토) 10:00~13:00
■ 장소 : 예술의전당 앞
■ 코스 : 녹사평역1번출구-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원불교서울교당의 흔적)-이슬람 서울중앙성원-이태원우사단길-보광사-한국폴리텍대학교정수캠퍼스
■ 후원 : 서울시청(건축기획과)

▲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 ‘문화지평’은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서울의 종단별 첫 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을 진행한다.

[미디어파인 칼럼=종교‧근대건축물 답사] 2020년 서울시 건축문화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문화지평의 ‘종단별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건축물 답사‧아카이빙’ 사업 4회차 답사가 지난 7월 4일 진행됐다. 이번 답사는 이슬람교중앙성원과 이태원 일대, 한강로에 남은 원불교서울교당의 흔적을 듣는 시간이었다. 해설은 배건욱 역사문화해설사가 진행했다.

문화지평 답사팀은 4일 오전 10시 녹사평역 1번 출구에서 만나 일정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시점이지만 개인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다짐하고 답사를 시작했다. 이날 답사는 해설 포인트의 건축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감성이 묻어 있는 답사기로 나눠 기록했다.

이슬람교의 전파와 이슬람인들의 정착

▲ 이슬람 성지 메카.

이슬람은 무함마드에 의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620년에 창시됐다.한국과 이슬람 세계와의 최초 접촉은 국제무역을 통해서 통일신라 말기 및 고려전기에 주로 페르시아계 무슬림들과의 교류다. 중국 동남부에 거주하던 무슬림 상인들이 통일신라까지 들어와서 교역상품과 이슬람 문화를 전했다.

고려시대 11세기 초에는 대식(大食)으로 알려진 이슬람 제국의 상인들이 대규모로 고려조정과 교역을 시도했다고 전해진다. 이들 중 일부는 고려에 정착해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적․민족적 공동체를 이뤘고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그들 공동체 내에서 예궁이라 불리는 이슬람 사원을 두었다.

한반도에 이슬람과 그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시기는 조선 초 13~14세기이다. 조선 초기 세종 재위기에 궁중의 공식행사에는 무슬림들의 대표나 종교지도자들이 초청돼 임금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15세기 중엽 이후에는 조선왕조의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이슬람 문화는 배척되면서 결국 자생력을 갖지 못하게 됐다.

이슬람이 한반도에 다시 이주해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다. 이때는 한반도에 들어온 무슬림들은 종교와 정치적 이유로 유입됐다. 당시 만주에 머물렀던 중국계 또는 한국계 무슬림들 중 일부가 1920년대에 한반도에 이주해온 무슬림들로 추측된다.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의 억압으로부터 이탈한 투르크인들이나 강제노역에서 탈출한 200여명의 터키계 러시아인들이 만주를 거쳐 한국으로 이주해 와서 영구적으로 정착하게 됐다.

이들은 1928년 서울에 무슬림 터키협회를 구성하고 자체학교 및 문화회관 등을 소유했다. 서울 시청 뒤편의 2층 건물을 매입해 문화회관을 열었고 이곳에 이슬람 예배소와 학교 등을 설치했다. 서울 홍제동에는 이슬람 전용묘지를 조성하기도 했다. 1930~4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 평균 약 70개의 터키인 점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서울에서만 최소 30개의 점포에 35~40가구, 약 100명의 터키인이 거주했다.

이들 투르크계 무슬림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할 때까지 서울, 부산, 대구, 신의주, 평양과 혜산 등지에 널리 분산되어 정착했고 그들은 주로 의류 도․소매업을 중심으로 포목점과 양복점을 경영했다.

터키인이 운영하는 알타이 양복점에 취직했던 박재성은 1932년 한국인 최초의 무슬림이 됐다. 국내에 거주하던 투르크계 무슬림들은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 대부분 해외로 이주했다. 결국 투르크계 무슬림들은 한국에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포교하지 못했고 한국무슬림 공동체 형성에도 특별한 영향력을 못 미쳤다.

50년대 이후 무슬림 1세대 형성…최초 천막 모스크 등장

▲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군의 포교로 이슬람교는 다시금 한국인들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슬람은 1950년대 이후부터 한국역사 속에서 그들의 공동체를 움틔웠다. 1950년 6․25전쟁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군인의 포교로 이슬람이 한국인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당시 터키 제6사단 사령부의 이맘(이슬람교 교단 조직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하나의 직명)이었던 압둘가푸르 카라이스마일오울루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포교를 한 결과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 등이 개종했다. 또한 1956년 20세의 청년 이맘 주베이르 코치가 여단군 이맘으로 부임해 오면서 한국 무슬림 1세대가 형성됐다.

1955년 이후 김유도와 김진규는 ‘한국이슬람협회’를 만들어 터키군 이맘을 도와 이슬람 전파활동을 시작했다. 이 협회는 1955년 10월 터키군의 지원을 받아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야전용 천막 3동을 설치해 임시 모스크와 사무실로 사용했다. 1956년 청진학원을 세워 이슬람 교리교육과 중등교육을 한국 소년들에게 가르쳤다. 이는 한국 이슬람 근대사에서 최초의 이슬람 모스크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무슬림 수는 208명이었고 이러한 활동을 계기로 한반도에 무슬림 공동체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55년 9월 12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강당에서 첫 이슬람식 예배건물 개원식을 가졌다. 이때에 윤두영은 한국이슬람 사상 첫 한국인 이맘으로 임명됐으며 무함마드 윤두영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0년대부터 한국무슬림들은 좀 더 조직적으로 한국에 이슬람 포교활동을 펼치는 한편 이슬람 국가들과의 유대강화에도 적극적이어서 김진규는 사우디아라비아 순방 중 성지순례에 참가함으로써 한국 무슬림으로서는 최초로 성지순례자가 됐다.

1963년 말레이시아 국회의장 하지 무함마드 노아가 한국을 방문, 한국에 이슬람 전파를 위하여 본국 정부에 건의한 결과 말레이시아 정부는 한국에 모스크 건립기금으로 미화 3만3000달러를 제공했고 이는 한국의 무슬림 공동체를 강화시키는데 큰 힘이 됐다. 1965년 현 ‘한국이슬람교 중앙회’의 전신인 ‘한국이슬람교 중앙연합회’가 설립됐다. 1967년 6월 격월간지 ‘코리아 이슬람 헤럴드’를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했고 1976년 한국무슬림들이 만든 공식 조직체인 ‘한국 이슬람 재단’이 발족됐다. 이들은 남영동에 사무실 겸 임시 모스크를 만들었다.

1970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 사유지 1500평을 중앙모스크 건립용 부지로 하사했다. 이면에는 석유파동에 따른 안정적 석유 확보를 위한 ‘제스쳐’라는 평가가 있다. 또한 중동 근로자 파견을 통한 외화획득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포석이 있었다.

1976년 5월 세계 17개 이슬람 국가로부터 장관 및 국회의원을 포함한 약 50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에서는 최초로 아랍 건축양식에 의한 돔식 서울중앙모스크 개원식이 거행됐다. 이로써 최초의 한국이슬람 중앙모스크의 개원을 시작으로 한국이슬람은 급속한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됐다.

1970년대 초반부터 불어온 한국내의 건설경기의 빠른 성장은 중동 이슬람 국가의 건설 붐과 맞물려 수많은 인력이 아랍 이슬람 국가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1973년 중동사업은 본격화되었고 이태원 모스크에서는 당시 현지 이슬람 문화를 알지 못하는 해외건설 파견자들에게 이슬람 교육을 실시하게 됐다. 그 결과 그때까지만 해도 3700명이던 무슬림 수가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1970~80년대는 한반도에 이슬람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빠른 속도로 이슬람이 전파되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87년 이후 이주노동자들은 제조업과 건설부분의 인력부족이라는 경제적인 이유로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80년대 말부터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 무슬림 노동자들의 유입이 시작된 이후 한국사회에는 다양한 국적과 계층의 무슬림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한국이슬람은 통일신라 말기에 무슬림들과의 교류를 통한 최초의 접촉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는 문화적 교류가 있었을 뿐이었다가1950~60년대에 한반도에 무슬림 공동체가 정착하기 시작했고 1976년 최초의 한국이슬람 중앙모스크 개원을 시작으로 변화와 확장을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태원부군당,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을 비는 곳

▲ 이태원부군당은 민족신앙의 뿌리를 유지하며 지내 온 마을당으로 역성을 표명하는 민간신앙의 상징으로 가치가 있는 공간이다.

문화지평 답사팀은 이슬람중앙성원에 가기 전에 먼저 이태원부군당을 올랐다. 녹사평역에서 남산자락을 타고 유관순로를 오르다 보면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 이태원부군당과 유관순 열사의 추모시설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 역사공원으로 묶어 놓은 것이다.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부군당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부군당굿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부군당은 서울과 경기도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 놓은 신당을 말한다. 400여 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는 이태원 부군당굿은 애초에는 일 년 두 차례인 정월달과 4월 달 길일을 골라 당주무녀가 주재하는 큰굿을 하고, 7월 달과 10월 상달에는 화주(貨主)들이 주재하는 간단한 당고사를 치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의례 횟수는 줄어들었고, 1960년대부터는 규모나 형식이 더욱 줄어들었다가, 2000년대가 되면서 4월달 봄에 큰굿을 하고, 당고사는 가을에 행했다. 그러나 현재는 봄·가을로 간단한 당고사만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칙적으로 당굿의 모든 재정은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사 비용을 마련하지만 근래에는 관공서로부터 마을전통문화 전승지원금 일부를 받는다. 근현대의 산업화 과정에서도 옛 관습을 이어받아 민족신앙의 뿌리를 유지하며 지내 온 마을당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민족 신앙의 원형적 산실에서 거행되고 있는 전형적인 서울지역 마을굿인 동시에 지역성을 표명하는 민간신앙의 상징으로 가치가 있는 공간이다.

원불교 서울교당, 재건축 과정에서 옛 건물 영광으로 이건

▲ 경복궁 후원인 현 청와대 자리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은 한강로에서 일본 사찰로 쓰이다가 해방 후 원불교가 인수, 전남 영광 성지 옥당박물관의 부속 건물로 이건했고 융문당은 영산선학대학교 전면에 복원돼 창립선진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날 해설을 맡은 배건욱 해설사는 한강로 쪽을 가르키며 원불교 서울교당 이야기를 꺼냈다. 1916년 소태산(少太山) 박중빈이 창시한 한국의 신 불교로 일원상의 진리와 함께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를 추구하는 종교다. 지방에서 만들어진 탓에 서울에는 교당이 있다. 한강로에 서울교당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성부 한강통(한강로) 11번지에 소재했던 일본 진언종 계통의 사찰인 용광사가 경복궁 후원지역(현 청와대)에 중건된 융문당과 융무당의 부재를 사들여 절을 지었다. 융문당과 융무당은 중건 당시 군사들의 열병과 과거시험장으로 사용했다. 해방 후 적산이 된 것을1946년 원불교가 인수 서울교당으로 삼았다. 융문당은 법당, 융무당은 생활관으로 사용했다.

2007년에 서울교당 부지에 하이원빌리지를 짓고 융무당은 전남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대치미 폐교 자리에 설립된 원불교 옥당박물관의 부속 건물로 이건했고 융문당은 영산선학대학교 전면에 복원돼 창립선진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슬람 서울중앙성원, 공동무덤 위에 지어진 숭고한 기도처

▲ 서울 용산구 우사단로(한남동)에 위치한 서울중앙성원은 한국정부로부터 땅을 받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국가의 지원을 받아 1976년 개원한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원이다.

서울 용산구 우사단로(한남동)에 위치한 서울중앙성원은 1969년 5월 1500평의 성원건립 부지를 한국 정부로부터 받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국가의 성원건립 비용을 지원받아 1974년 10월 착공, 1976년 5월 21일 개원한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원이다.

한강과 남산의 중간지점에 자리한 서울중앙성원은 1층에 사무실, 강의실, 접견실과 2층에 남성예배실, 3층에 여성예배실이 있다. 부속건물인 이슬람센터는 3층으로 되어 있는 데 1층에는 이슬람 가게들, 2, 3층에는 무슬림 어린이들을 위한 이슬람학교와 무슬림 신도회 등이 있다.

서울중앙성원은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지만 복장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노출된 옷을 입고 성원에 왔을 경우는 경비실 옆 착의실에 구비되어 있는 옷(치마, 히잡 등)을 착용하고 모스크 안으로 입장해야 한다.

모스크는 이슬람의 종교 건축물로서 이슬람 공동체의 중심이자 이슬람 역사 속에서 다양한 영역의 주 무대로써 삶의 전반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모스크를 구성하는 조건은 매우 단순하다. 물론 잘 지어진 건물과 세부적인 다양한 요소들을 갖추면 좋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메카를 향해 기도할 수 있는 깨끗한 공간과 기도하기 전에 청결을 위해 세정을 할 수 있는 장소가 갖춰지면 된다. 예식이나 의식을 위해 필수적인 다른 요구사항은 없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모스크가 세워지기 이전에 어느 한적한 길에서 기도했고 전 지구가 하나의 모스크라고 말했던 것처럼 모스크의 조건은 그리 어렵거나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모스크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반원형의 입체적인 돔을 이고 있는 예배실과 탑처럼 높게 솟은 미나렛이 그것이다.

이태원우사단길, 청년창업자와 예술가들이 만든 공간

▲ 이슬람색채와 청년 예술가, 핫플이 공존하는 우사단길.

우사단길은 한국적 정서와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길 이름은 조선 태종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우사단’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파키스탄, 터키, 이집트, 레바논, 인도 등지의 음식점과 아랍어로 적힌 간판, 히잡과 터번을 쓴 이방인이 어우러진 서울 속의 이슬람 색채가 강한 공간이다.

오래된 집과 골목이 오밀조밀 이어지는 주택가로 한국적 정서와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2010년대 초반부터는 젊은 예술가와 청년 창업자들이 우사단길로 들어와 개성 넘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우사단길은 도깨비시장과 접해 있는 데 이 시장은 1960년대에 생겼다. 부근이 죄다 공동묘지였는데 외지인들이 작은 판잣집을 지어 행상을 하며 살다가 저녁이면 반짝 장이 서서 서로의 물건을 교환했다. 사람들이 모였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도깨비 같다 해서 도깨비시장이란 이름이 붙었다. 황학동 도깨비시장도 같은 맥락이다.

우사단길의 핫플은 도깨비시장 쪽 ‘음레코드’다. 레트로 LP 문화를 쉽고 편하게 접하는 음레코드는 음료나 맥주를 마시며 LP와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구입도 가능하다. 빈티지하면서 아날로그적인 분위기가 돋보여 유명 가수들이 화보를 촬영하러 오기도 한다. 옥상은 멀리 남산N타워부터 가까이 우사단길 도깨비시장DL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한남3지구와 4지구의 오밀조밀 정겨운 모습이 한 눈에 꽉 찬다.

보광사, 제갈공명을 기리는 무후묘 품고 있는 곳

▲ 보광사 안에는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인 무후묘가 있다.

답사팀은 한남동에서 보광동으로 이동했다. 우사단로 끝에 쯤 있는 한광교회는 한남동과 보광동의 경계를 나타내는 이름을 가진 교회다. 이 지역은 한남3구역이 재개발 확정이 되면서 주민들이 예민해져 있다. 이날도 사진을 찍지 말라는 한 주민이 골목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보광동 골목을 꼬불꼬불 돌면서 올라가자 보광사가 나타났다. 이곳은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인 무후묘가 있는 곳이다. 무후묘는 제갈량의 능묘로 오리지널은 중국 산시성 한중시 몐현성 남쪽 4㎞ 지점의 정쥔산 전장터 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있다.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 군중에서 사망하자 촉한 조정은 그를 이곳에 안장했다. 묘의 높이는 5m, 둘레는 60m이며 사방은 팔괘 모양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묘 앞에 서있는 비석에는 제갈량무후지묘(诸葛亮武侯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보광사 무후묘는 제갈량을 섬기는 사당으로 해마다 음력 삼월과 시월의 초하루에 제사를 지낸다

폴리텍대 정수캠퍼스, 정수직업훈련원서 변모 거듭

▲ 정수직업훈련원에서 국책 특수대학으로 변모를 거듭한 한국폴리텍대학교 정수캠퍼스.

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답사팀은 다시 이태원 방향으로 보광동길을 오르고 있었다. 이태원 답사는 상당히 많이 오르락내리락 한 셈이다. 그래서 마지막 한국폴리텍Ⅰ대학교정수캠퍼스 설명을 할 때는 다들 지쳐 보였다.

폴리텍대는 ‘평생기술로 평생직업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술 중심의 실무기능 인력을 양성하는 고용노동부 산하의 특수대학이다. 민간부분에서 담당하기 어려운 국가기간산업과 신산업분야의 다기능기술자, 기능장 등 중간기술 인력을 양성해 근로자의 평생직업능력 개발, 산학협력사업 및 지역산업인력 개발 등 국가인적자원개발 사업을 수행한다.

전국 11개 대학, 35개 캠퍼스로 구성됐다. 정수캠퍼스는 정수직업훈련원이 전신이다. 정수직업훈련원은 1994년 정수직업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6년 정수기능대학으로 승격됐다. 2006년 정수기능대학은 서울정보기능대학, 성남기능대학, 제주직업전문학교 등과 통합하면서 문을 닫았다. 통합학교가 바로 한국폴리텍Ⅰ대학이다.

[문화지평]
서울시비영리민간단체(답사‧아카이브 전문단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2016)
역사도시 서울답사(2017)
서울 구석구석 톺아보기(2018)
2천년 역사도시 서울 진피답사(2019)
서울미래유산 시장 관광자원화 아카이빙(2019)
서울 첫 종교건축물과 주변 근대 건축물 답사‧아카이빙(2020)
지자체‧기업‧단체 인문역사답사‧강연 진행

<참고문헌>
-권지윤, ‘한국의 이슬람’, ‘이스마엘 우리의 형제’(햇불트리니티 한국이슬람연구소, 제111호, 2012), 6.
-한국이슬람교중앙회,『Islam in Korea』,
-이희수, ‘이슬람과 한국문화’(파주: 청아출판사, 2012)
-이희수, ‘이슬람’
-이정순, ‘21세기 한국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서울: 도서출판 대서, 2012)
-김영남, ‘이주 무슬림의 한국사회 정착에 대한 선교적 고찰’, (한국선교신학회, 2009)
-정수일, ‘이슬람 문명’(파주: ㈜창비, 2005)
-한국이슬람교 홈페이지
-‘모스크의 형태와 기능에 관한 연구’, 황인혜. 명지대학교 대학원. 2019
-무후묘(국가급 중국문화유산총람, 2010. 8. 1., 황매희 편집부)
-한국폴리텍대학(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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