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부산행’에 열광했지만 ‘염력’에 실망한 연상호 감독의 팬에게 ‘반도’는 다소 의아하거나 불편할 수도 있다. 좀비의 전투력은 진화했지만 어쩐지 멍청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활약이 쇠락했다. 물론 정서적으로 ‘부산행’과 ‘반도’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액션이 강화되고 세계관이 깊어진 것은 맞다.

‘K-좀비’라는 표현이 다소 민망한 것도 사실이다. 좀비는 빌런의 중심이 못 되고, 극한 상황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채 악마가 돼버린 631부대원들의 극악무도한 정체성에 이유를 제공해 줌으로써 그저 그들의 존재를 더욱 사악하게 포장해 주기 위한 애피타이저 역할로 전락했다는 비판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액션이 세련되고 버라이어티 해진 것은 확실하다.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의 합체 로봇처럼 변한 좀비 무리가 주는 공포는 확실히 차원이 다르다. 왜 하필 좀비일까?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제약 재벌 엄브렐러의 비밀 실험으로 좀비가 탄생하는데 이 회사는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흔든다.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감독, 1982)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의 오남용으로 지구가 황폐해져 더 이상 사람이 살기 힘들어진 미래. 식민 행성 개발에 주력하는 가운데 그 첨병인 복제인간을 타이렐이란 재벌이 생산한다. 역시 재벌이 권력의 핵심이다. ‘반도’의 좀비 역시 바이오 공장에서 기인한다.

자본주의 권력과 기술의 오남용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기존의 교훈을 확장한 인간성마저 말살한다는 환유다. 중국의 ‘귀타귀’는 무덤 속의 시체를 되살렸다. 좀비 역시 시작 땐 유사한 설정이었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현대의 좀비는 좀비에게 물린 사람이기에 ‘시체’ 좀비와는 정체성이 많이 달라졌다.

‘반도’의 좀비가 매우 날쌘 이유다. 할리우드의 좀비는 많이 느리다. 심지어 ‘좀비랜드’(2009)의 좀비들은 좀비 분장을 한 빌 머레이에게 속아 넘어갈 정도로 어리숙하다. ‘반도’의 좀비가 이토록 진화한 이유는 그만큼 현대인이 이기적이고 사악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와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괴물’(봉준호 감독, 2006)의 맥락과도 맞물린다. 사실상 국가 자체가 무색해진 한국의 난민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미군이 쥔 인트로가 강렬하게 시사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좀비가 영화로 계속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는 관객의 취향 때문이겠지만 ‘반도’에서만큼은 인류의 인간성의 상실을 뜻한다.

좀비는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무의식이다. 그들이 산 사람만 보면 달려들어 물어뜯는 행위는 인간의 리비도이자 무의식적인 ‘강박행위’다. 이에 비해 631의 폭력과 살인은 의식적 리비도다. 발산하지 못한 성욕이 폭력과 살인 등 악행으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좀비와 631 중 누가 더 나쁠까?

반도는 신의 계시대로 아포칼립스를 맞았고, 4년 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당연히 무정부상태의 아비규환이다. 이는 문명이 파괴된 이후의 세계를 그린 ‘매드 맥스’ 시리즈와 유사한 배경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의 차이는 문명의 유무다. 그래서 디스토피아는 독재자가 있기 마련이다.

SF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메트로폴리스’(프리츠 랑 감독, 1927)가 대표적이다. ‘기생충’의 설정은 이를 연상케 하기도. 그런데 ‘반도’를 가만히 보면 외형적으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지만 내부적으로는 디스토피아이기도 하다. 631의 헤게모니를 놓고 암투 중인 황 중사와 서 대위가 있기 때문이다.

서 대위는 식량 등 생필품 배급권을 쥐고 있다. 황 중사는 부대 지휘권을 갖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신흥 귀족인 재벌가의 자제 혹은 경영자 대 공장장의 구도와 유사하다. 영화의 결말을 보면 이 대비가 더욱 강하게 와닿을 듯. 어쨌든 이들이 조직 내 최고의 권력을 다투는 독재자인 건 맞다.

왜 묵시록인가? 지구의 나이는 45억 5000년 정도로 추정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출현은 4~3만 년 전으로 본다. 각 개체는 100년 살기가 쉽지 않고 지구 역시 언젠간 다른 행성들처럼 우주 속의 먼지가 되거나 그 전에 이미 인류의 환경 파괴로 황폐해져 유기체가 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암울한 미래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많이 배울수록, 이타적일수록 그런 우려와 고민은 크기 마련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후손들에게 깨끗한 환경, 훌륭한 문화를 물려줄까 고뇌하기 일쑤. ‘반도’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대한 두려움, 독재에 대한 걱정이 반영돼있다.

정석의 트라우마는 가족을 구하려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은 채 일찌감치 포기했다는 자책감에 근거한다. 그전에 그는 어린 딸 유진만이라도 데려가 달라는 민정의 애원도 외면할 만큼 이기적이거나 우유부단했다. 하지만 민정의 숭고한 행동을 보고 변한다. 여자는 남자의 스승이라는 설정.

또한 칸트의 실천이성인 선의지(Good will)다. 고대 그리스부터 인간의 의무를 묻는 윤리적, 실천적 행위와 가치를 문제 삼았다. 그건 곧 선의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공포와 태연함의 중용은 용기’라고 썼고, 칸트는 ‘인간 이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덕(실천)’이라고 외쳤다.

칼 카우츠키는 ‘악은 무지단견(無智短見)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지혜와 변별력이 없는 게 악이라는 뜻. 그렇다면 슬기롭게 행동할 줄 알고 형상과 현상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 선이고 도덕이다. 정석은 민정과 그녀의 어린 두 딸을 통해 인식론을 확립한다. 세계가 주목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OSEN)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