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의 모든 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하라 [김문 작가]

김문 작가l승인2020.07.22l수정2020.07.2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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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김문 작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4인과의 인터뷰-도산 안창호]

▲ 사진 출처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김문 작가)

-선생님께서 민족중흥, 청년 교육 등을 위해 설립한 학교나 단체가 적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방금 말씀하신 흥사단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1913년 선생님께서 창립한 이래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살아있는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흥사단 창립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습니까. 흥사단도 처음 조직될 때는 제가 일정 역할을 했겠습니다만 오늘날까지 그 단체가 명맥을 유지하고 또 활동을 해나가는 건 모두 후배 단원들 덕일 것입니다. 흥사단은 1913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근본을 따지고 든다면 1907년에 만든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뿌리라고 하겠습니다. 일본에 대항하려면 인재와 금전, 단결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승훈, 안태국, 양기탁, 이갑 선생 등이 발기해 만든 조직입니다. 신민회가 비밀결사이다 보니 공개적인 사업을 하기는 어려웠지요. 이에 널리 인재를 기르고 공개 사업도 할 겸하여 만든 것이 청년학우회입니다.”

-청년학우회가 곧 흥사단의 전신이란 말씀이신가요?

“그런 셈입니다. 청년학우회는 최남선, 윤치호 선생 등이 희생적으로 이끌었는데 제가 만주로 시베리아로 또 미주로 떠나가는 사이 합방이 되고 학우회도 없어졌습니다. 미주에 있을 당시 동지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양심의 책망이 더해져서 다시 청년학우회를 만든 것이 바로 흥사단이었습니다. 청년학우회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면 본국에 있는 전 학우들이 곤란할지도 모르겠고, 또 전 회원 중에 이미 학우회의 정신을 망각한 자들도 있어 새로 만든 단체에는 흥사단이란 다른 이름을 붙인 것이지요.”

-지금도 흥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무실역행(務實力行)’을 중요한 정신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흥사단의 창립 정신, 당시의 목표 등은 무엇이었습니까? 독립 운동가의 양성이었습니까?

“죽는 날까지 단지 한두 사람을 만나고 말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하고 한 가지 주의에 따라 모이는 단체를 만들자,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흥사단을 발기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렇게나 조직을 한 것이 아니라, 비록 미주에서 만들긴 했습니다만 조선8도에서 8인의 창단위원을 엄선했었습니다. 조직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민족전도 대업의 기초’를 다지는 것입니다.”

-민족전도의 대업이라는 게 당시에는 민족 독립이었던 것이지요?

“맞습니다. 그 보다 더 큰일이란 있을 수가 없었지요. 독립 운동에 헌신할 지도적 인물을 키우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 그게 흥사단의 꿈이었습니다. 저는 흥사단 단우들에게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도 흥사단을 위해, 돈을 버는 것도 흥사단을 위해 합시다. 이렇게 하여 우리 흥사단은 다시 국가와 민족을 본위로 합시다. 흥사단 동지를 모으는 것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흥사단의 재력을 충실하게 만드는 것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흥사단의 사업을 발전시키는 것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흥사단의 세력을 확대함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 무엇이 되었든 흥사단은 온전히 국가와 민족을 중심에 놓고 희생적 인물이 집합한 단결로써 희생합시다’라고 말입니다.”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흥사단의 정신이란 것이 결국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청년들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와 다를지 않았을 듯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청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흥사단원들에게 강조하셨던 것들을 몇 가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흥사단 대회장에서 정식 단원과 예비 단원들에게 했던 말들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되겠습니다. 우선 여러분 모두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조직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모두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누가 시켜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더욱 자립적으로 모임의 일을 해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확실하고 바른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단체 중에는 아무 가치 없는 신념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확실하고 바른 신념이 없으면 어제 이것을 하다가 오늘은 저것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게 됩니다. 확실한 관찰과 연구로 명확한 판단을 얻고 여기에 기반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청년에 관한 얘기가 나온 김에 말씀을 좀 더 해주셨으면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애국 청년들을 길러내기 위해 청년학우회, 수양동우회, 흥사단 등을 조직하시고 점진학교, 대성학교, 동명학원 등도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노력을 하셨는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청년들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한의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또 해야 될 말도 많지만 여기서 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큰 짐을 지고 있는 청년들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은 인격 훈련과 단결 훈련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때가 어느 때라고 인격이니 단결 훈련 같은 것을 하고 앉아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은 힘의 산물입니다. 힘이 작으면 작게 이루고, 힘이 크면 크게 이루며, 만일 힘이 도무지 없으면 일은 하나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목적에 달하려는 자는 먼저 힘을 찾아야 합니다. 그 힘은 어디서 오겠습니까. 건전한 인격과 공고한 단결에서 그 힘이 나온다는 것을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청년들 앞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장애가 되는 것은 방황과 주저라고 봅니다. 할까 말까 하여 ‘말까’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방황과 주저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살아 나갈 일은 자기가 해야 합니다. 민족적으로 파멸의 지경에 처해 있는데 방황하고 주저하는 것이 공적(公敵)이라면 자기 개인의 살아 나갈 길을 하지 않고 방황, 주저하는 것이 사적(私敵)이라고 하겠습니다.”

-민족의 일이든 개인의 일이든 적극성을 띠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지금 배울 기회가 있을 때 배우고 벌이할 기회가 있을 때 벌이를 하다가 그보다 더 긴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다 나서는 것이 옳습니다. 이 일을 할까 말까 방황하고 주저하면 거기에는 고통과 낙망이 생깁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민족의 위기를 맞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대한의 환경은 사회도덕이나 경제 등 모두 심히 어렵습니다. 이것을 헤치고 나아가려면 아까 말씀드린대로 참고 견디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옳다고 생각한 일에 밝은 판단을 내리고 판단한 일은 끝까지 잡고 나아가면 그 끝에는 성공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청년들에게 주고 싶습니다. 어떤 신이 무심중에 와서 갑자기 네게 묻기를 ‘너는 무엇을 하느냐’ 할 때에 ‘나는 어떤 것을 하고 있노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할 수 있게 하라.”

-오늘 만난 김에 애국가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애국가를 작곡하신 분이 안익태 선생이라는 사실은 국민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작사가는 ‘미상’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유력한 후보로 도산 선생님과, 선생님께서 설립하신 평양 대성학교의 교장이었던 윤치호 선생을 들고 있습니다. 춘원 이광수 선생의 ‘도산 전기’를 보면 춘원이 “애국가는 선생께서 지으셨지요?”라고 묻었더니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분명하게 부정을 하지는 않으신 거지요. 게다가 윤치호 선생이 지었다고 하기에는 처음 기록된 가사의 철자법 등이 시대적으로 맞지 않고, 윤치호 일기에도 애국가에 관한 기록도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애국가의 작사가가 선생님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설립하신 흥사단은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애국가는 4절까지 모두 부른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대체 진실이 뭡니까? 애국가 작사가는 누굽니까?

“제가 이 자리에서 애국가의 작사자는 나다,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부르는 애국가 가사의 원류가 무엇인지는 학자들이 연구하고 밝혀야 할 문제로 남겨두겠습니다. 다만 제가 청년 교육과 민족정신 배양의 한 방법으로 노래의 효용성을 중시한 것은 사실입니다. 거국가, 청년학우회가 등을 손수 짓기도 했지요. 애국가에 대해서는 그 작사가가 누구든 우리 대한의 국민들이 때마다 그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우문현답이네요. 제가 얻을 것도 없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허허, 괜찮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게 기자들의 임무이니 궁금해 하고 궁금한 걸 질문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기독교인으로 독립 운동을 하실 때에도 가시는 곳마다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열여섯 살에 서울 정동에 있는 구세학당에 다니실 때 이미 성경과 기독교 사상에 대해 배우셨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어떠셨습니까.

“제가 예수교를 접한 것은 구세학당에 다닐 때였고 이후 아내와 정혼을 할 때도 예수교 수용을 조건으로 내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대로 된 설교를 하고 하나님의 참뜻을 말할 정도의 도덕이나 경험은 물론이고 교인다운 생활의 경력을 갖춘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우리 사랑합시다’라는 구절을 좋아했고 동포 교인들에게도 사랑을 전파하려고 애썼습니다.

예수교의 종지는 사랑이니 교인이라면 이를 절실히 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에 가난한 사람 하나가 앓고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문병하러 가서는 신령한 기도를 드리면서 병이 낫기만을 빌고 약이나 미음을 쓸 수 있게 제 주머니에 있는 돈은 단 한 푼도 내놓지 않는다면 그게 과연 신령스러운 구원이라고 하겠습니까. 교인들의 독립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독립 운동을 위해 힘을 많이 쓰는 이가 진정한 교인이고 진정한 신령입니다. 이제 죽고 사는 아슬아슬한 이 때에 금전과 생명을 희생하는 자라야 오직 신령한 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신앙생활도 오직 독립 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보셨다는 느낌이 물씬 납니다. 꽤 긴 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오늘 제가 드린 질문만 봐도 분야가 참 다양합니다.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계몽운동, 교육활동, 정당 창당, 해외 교민 생활 개선 등…, 선생님의 성함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지만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셨기에 오히려 ‘도산에 대해 설명을 해보라’라고 하면 다들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희 같은 기자들이 열심히 알려야 하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선생님 본인께서는 후손들에게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제가 후손들이 기억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독립운동가 안창호’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제가 했던 이런 저런 일들은 결국 대한의 독립을 위해 벌였던 일일뿐입니다.”

-그거면 됩니까? 서운하지 않으십니까.

도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 사진=kbs방송화면 캡처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꿈꾸셨던 나라를 저희 후손들이 잘 만들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시기에 마음에 들지 않고 모자라 보이는 것도 많겠지만 후손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애국을 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실역행 하고 있다는 말씀을 감히 제가 드리면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네. 후손들도 노력할 것이란 점을 의심치 않습니다.”

-인터뷰 중에 무례한 질문에 기분이 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후손들이 적지 않구나 하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긴 시간 충실히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자 선생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끝난 거지요? 참느라 혼났습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선생님, 여기는 금연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서는 애연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전에 부인 이혜련 여사께서 증언을 하신 것도 있었습니다. 여사께서 미국에서 함께 했던 신혼생활을 회고하면서 ‘그 분은 첫째가 조국, 둘째가 담배, 그리고 아내와 자식은 열두 번째였다’고 털어놓으셨더라고요. 하하하.

“그런 말을 했군요. 그래도 담배보다는 조국을 더 사랑한다고 아내도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건 다행입니다. 허허허.”

담배를 다시 안주머니를 집어넣은 도산은 지긋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는 공원 안쪽으로 걸어갔다. 도산공원 한편에는 그와 부인 이혜련 여사가 합장된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참고 인용했다>
도산의 답변은 모두 생전 그의 글과 연설에서 발췌하여 문맥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도산은 열정적인 연설가였지만 편지 글과 일기 외에 글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만 46세를 맞은 192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춘원 이광수에게 구술해 작성한 뒤 ‘동아일보’와 잡지 ‘동광’에 연재한 ‘동포에게 고하는 글’은 도산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독립신문’과 ‘신한민보’ 등에 실린 연설문 또는 연설문 개요, 동지 및 가족들과 주고받은 서한 등을 활용해 살을 붙였다. 도산의 삶의 여정에 관한 내용은 주요한 선생이 정리한 ‘안도산 전서(증보판)’(흥사단출판부, 2015)의 전기 부분과 김삼웅의 ‘투사와 신사, 안창호 평전’(현암사, 2013)를 주로 참고했다.

▲ 김문 작가 – 내 직업은 독립운동이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미디어파인 칼럼니스트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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