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전함 포템킨’(세르게이 M. 에이젠슈타인 감독)이 걸작이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거장인 걸 국내 관객은 다 알고 있지만 왠지 러시아(구소련)의 영화는 거리가 좀 있다. 그러나 ‘블랙아웃: 인베이전 어스’(예고르 바라노프 감독)는 언어만 바꾸면 좀비를 응용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SF와 다름없다.

가까운 미래.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의 모든 통신이 두절되고 러시아의 일부 지역만 제외하곤 모든 사람이 실종된다. 유일한 생존 지역의 군대는 격리 지구인 키로프에 여의사 알레나, 여기자 올리아가 포함된 정찰대를 보낸다. 본부의 병원에 입원한 사샤에게 수상해 보이는 이드라는 자가 찾아온다.

마트에 설치한 부비트랩이 폭발하자 정찰대는 그곳에서 부상을 입은 한 소년을 발견해 데려와 치료해 준다. 그러나 소년은 갑자기 칼로 팀장을 찔러 죽이고 부대원에게 사살된다. 정찰대는 누군가에게 조종을 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격에 점점 희생돼 올레그, 유리이, 올리아 등 몇 명만 살아남는데.

블랙아웃은 전력 공급의 중단, 정보 차단, 영화나 연극의 암전을 의미한다. 죽음의 암시이기도 하다. 정보의 홍수 시대에 만약 전기와 커뮤니케이션이 끊긴다면 인간의 삶이 과연 삶일까를 묻는 출발부터 만만치 않다. 군데군데 허점이 안 보이는 건 아니지만 시나리오 자체에 엄청난 사상이 담겼다.

그걸 거대한 사이즈의 비주얼로 구현해낸 연출력도 놀랍다. 먼저 인류의 기원.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2012)는 인간이 외계인의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생명체라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자 인류의 기원을 찾기 위한 탐사대를 먼 외계 행성에 보내 인류는 물론 에이리언의 기원을 밝힌다.

‘프로메테우스’의 창조자인 엔지니어와 유사한 이드와 라가 등장하는 데서 흉내 내기의 비난에서 벗어나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스콧도 처음은 아니었으니 손가락질할 문제는 아니다. 이미 20세기부터 그레이엄 핸콕 등은 문명의 수수께끼를 역사와 다른 차원의 외계인의 방문으로 해석했다.

정보국 중령이 정체를 묻자 이드는 “너희 언어로 신”이라고 답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엔지니어다. 신화는 허구지만 역사의 유비적 교훈을 담는다. 그리스 신화의 티탄족 거인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만들었다. 동생 에피메테우스가 동물에게 모든 능력을 주자 그는 인간에게 제우스의 불을 훔쳐 전했다.

기독교는 그리스의 모든 신들을 제거한 뒤 유일신으로 세상을 만든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모든 사람이 기독교만 믿는 건 아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형제지만 가장 치열하게 다툰다. 아시아의 힌두교와 불교는 이슬람교와 거리를 두고, 그 와중에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도 견제해야 한다.

그뿐인가? 전 세계 각국의 각 민족이 전승해온 건국신화나 창조론은 제각각이다. 신과 신화를 신이 만들었거나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강력한 증거다. 프로이트는 정신을 자아, 초자아, 그리고 그것의 근원인 이드로 봤다. 라는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아멘 라에서 빌려왔다.

이드와 라는 20만 년 전에 지구에 와 인류를 창조했고, 그들의 종족은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의 행성이 수명을 다했기 때문에 지구를 식민지로 건설하려는 것. 그들은 자신들의 유전자로 인류를 창조했지만 종교를 만들고 그것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기에 멸종시키려 한다.

이드는 인류가 종교 때문에 되레 사랑, 연민, 자비를 잃었다고 꾸짖는다. 블랙아웃이 시작된 한 달 전의 TV 뉴스에선 각 종교인들이 무리 지어 그들의 신이 주장한 종말이 왔다며 불신을 부르대고, 제 교리를 부르짖는 장면이 등장한다. 어차피 행성은 언젠간 먼지로 변하게 돼있다. 종말론과는 별개다.

자신의 존재를 안 믿자 이드는 “수중도시나 피라미드를 인류가 만든 줄 아냐”고 묻는다. 이집트 쿠푸왕 피라미드는 제4왕조 즉 기원전 2613~2500년께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핸콕은 당시의 기술이나 기후로는 불가능하다는 견해에 동조하며 약 1만 5000년 전의 외계인 건설론을 주장한다.

그런 주장 혹은 의혹을 피력하는 저명한 사람들은 피터 제임스, 닉 소프 등 수두룩하다. 라는 잠적한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조종해 멀쩡한 사람들을 공격하게 만든다. 알레나는 정신을 조종당하느니 총이라도 쏘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종교적 세뇌나 독재자의 압제에 맞선 자의식을 뜻한다.

이드의 눈을 클로즈업하는 것도 그런 의미다. 눈은 마음의 창이자 의지의 창구다. 어떤 생각과 이념을 지니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너는 신이 아냐, 악마야”라는 대사도 그와 연결되는 도그마에 대한 반발이다. 모든 종교는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한다. 교조주의의 배리에 대한 반항.

인트로의 혼란스러운 경고음과 함께 타악기의 강렬한 타격감을 담은 음향효과부터 심상치 않은 SF 액션 스릴러다. 마지막 인류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군대와 인류를 멸종하기 위한 라의 조종으로 좀비처럼 변해버린 수많은 군중의 시가전은 할리우드의 웬만한 블록버스터를 능가할 수준이다.

특히 한밤중 수많은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시퀀스는 피와 살이 튀는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비장미를 넘어 아름답다. “전쟁은 인간 창조의 이유를 알게 한다”는 대사와 마지막 반전은 정말 강렬하다. 프로메테우스의 조종을 받은 좀비의 인류 공격과 ‘반도’보다 우울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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