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세드릭 클라피쉬 감독, 2018)은 와인의 텁텁하고, 향기롭고, 감미롭고, 쓴맛을 인생으로 표현한 매우 아름다운 영화다. 부르고뉴의 3대째 이어온 와이너리의 3남매 장, 줄리엣, 제레미. 장은 10년 전 집을 떠나 알리시아를 만나 호주에 정착해 5살 된 아들 벤과 산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줄리엣의 전화를 받고 집에 돌아온 장은 5년 전 엄마 장례식 때 왜 안 왔냐는 제레미의 강력한 항의를 받는다. 때마침 수확기여서 장은 눌러앉아 동생들과 와인을 만들고 그 나날 중에 아버지가 숨을 거둔다. 장은 알리시아와의 사이가 멀어졌고, 줄리엣은 농장 일을 버거워 한다.

제레미는 오세안과 결혼해 3개월 된 아들이 있고 와이너리를 비롯해 큰 사업을 하는 장인 소유의 앞집에 살며 장인을 돕는데 장인은 그를 하인 다루듯 하고, 장모는 부부를 아이 취급한다. 아버지는 전 재산을 3남매 공동소유로 해놨고 상속세 6억 원이 발생하지만 셋 모두 돈이 전혀 없어 고민한다.

장은 호주의 와이너리를 사느라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매달 100만 원씩 갚아야 하지만 그조차 힘들다. 3남매는 집을 팔고자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집보단 와이너리에 관심을 갖는다. 제일 다급한 장은 자기 지분을 팔려고 하지만 동생들은 부모의 땀과 자신들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지키고자 하는데.

프랑스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한국적 정서가 강해 감동이 더 크다. 장은 동생들을 가르치고 지켜줘야 한다는 아버지의 압박에 아주 힘들게 성장했다. 아버지는 3남매가 와이너리를 지켜주길 바라며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켰다. 장은 성장해 친구들이 도시로 떠나는 걸 보며 아버지와 매일 싸웠다.

제목이 그냥 주제다. 조금 더 파고들면 ‘모든 것은 유전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와 ‘변하는 건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대립 혹은 공존이다. 시작은 “어릴 때 매일 아침 창밖을 보며 달라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변한 건 없다”는 장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유전론과 불변론의 노골적인 충돌.

그가 집을 떠난 이유는 장남의 무게를 이겨내야 하는 현실이 지옥 같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싫었으며, 세상을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 그러나 그 10년의 방황 끝에 깨달은 건 모든 걸 볼 수는 없다는 인간의 한계. 그래서 아버지를 피해 떠났는데 아버지 때문에 돌아오게 된 아이러니컬한 인생 유전.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2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보는 강은 매일 똑같지만 사실은 매일 새로운 물질이다. 공간만 같을 뿐 시간은 다르다. 어제의 12시와 오늘의 12시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시간성은 다르다. 장이 10년 만에 돌아온 집은 그대로지만 3남매는 성장했듯.

감독은 꽤 공간성에 집착한다. 프랑스는 북반구 서유럽이지만 호주는 남반구 오세아니아다. 여름과 겨울이 반대. 제레미 아내 이름이 오세안! 장이 포도 수확 때 줄리엣이 고용한 노동자 중 흑인 여성 리나에게 출신을 묻자 피니스테르란 답이 돌아온다. 프랑스 최서단인데 라틴어로 땅 끝이란 뜻.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란 우리 대중가요 가사에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이 이원론으로 묶인다. 우리는 이사를 하고, 이직을 하며,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지만 결국 다수는 집으로 돌아온다. 해외에 정착해도 언제나 마음만은 고향을 향한다. 여우의 수구지심. 연어나 인간이나.

장은 이기주의자였고, 극단적인 유물론자였다. 그는 전에 알리시아에게 “사랑의 최고 순간은 처음 몇 개월”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에선 “하지만 당신과 떨어져 지내면서 바뀌었다. 사랑도 와인처럼 숙성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성숙했음을 입증한다. 인생도 와인처럼 숙성이 필요하다는 명제다.

장은 자기 지분을 팔고자 했지만 동생들은 반발했다. 제레미의 장인이 농장 일부를 사겠다고 하고, 3남매가 동의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장이 안 팔겠다는 반전을 보여준다. “부모가 일구고 우리가 자란 곳인데 팔아야 돼?”라는 제레미와 “팔면 내 인생은?”이라는 줄리엣의 항변의 의미를 깨우친 것.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출이 “내 뿌리에서 도망쳤던 것”이라며 과오를 인정하고 뉘우친다. 그렇게 이 영화는 인생이란 소재를 놓고 프롤레고메나(서설)부터 사의(헤아려 생각)까지 장황하게 펼치지만 잔소리(군더더기)가 별로 없어 스파클링 같은 상큼한 감동을 주며 로마네 콩티 같은 품격까지 풍긴다.

인생은 자신이 가는 것이기에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자립론도 강하다. 제레미는 데릴사위다. 장인이 하자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장인 와이너리의 시음회 때 와인 저장고 안에서 처음으로 그에게 속에 품었던 말을 쏟으며 독립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아들은 아빠가 된다.

독립적 여성상도 부각한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연약했던 줄리엣은 노동자들이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장과 아버지의 오랜 동료인 마르셀 아저씨가 사사건건 딴죽을 걸자 무기력감에 눈물을 흘리며 포기할 의사를 표현한다. 하지만 “네가 결정해”라는 장의 응원에 힘입어 자기주도적인 태도로 변화한다.

2주 후 와이너리 판매 계약을 하기로 결정한 줄리엣이 실직 후의 진로를 묻자 마르셀이 “난 3일 뒤 일기예보도 안 봐”라고 내놓는 답에 인생의 항로가 있다. 포도 수확 시기를 강조하는 건 ‘인생은 타이밍’이란 결정의 강조. 장의 그네는 인생은 모험으로 진행되지만 결국은 회귀본능이라는 주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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