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40대의 부부가 진료실을 찾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부인들이 상담을 신청하는데, 이 경우는 남편이 상담을 원하여 오게 된 경우였습니다.

강인한 인상의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결혼한지는 10년이 좀 넘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일하는 것이 좋아서 결혼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가 부모님들끼리 안면이 있어서 결혼을 서두르셨습니다.

사실 첫 인상부터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결혼하지 않을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의 권할 정도라면 그래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까지 하기는 좀 그렇지만, 자라온 환경이나 생활 수준이 달라서인지 아내는 살림이나 집안 행사 처리는 물론이고, 아이들 키우고 공부시키는 것까지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게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도 내 사람을 만들어 살면 된다는 생각에서 일일이 가르치고, 좋은 말로 타이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러다 보면 좀 심한 말도 하기는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잘하면, 제가 왜 그러겠어요. ​제가 잘못한 점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제가 노력하고 또 억울할 것이 더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내의 내조는 늘 모자랐지만 저는 회사와 가정 외에 한눈을 판 적이 없어요. 이제 좀 살만해 졌나 싶은데, ​느닷없이 아내가 저 때문에 우울증이 생겼다며 이혼해 달라는 겁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저도 그냥 이혼해버릴까 하다가, 애들도 있고 해서 상담을 받으면 무슨 수가 있을까 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상담자는 연약한 모습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부인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습니다. ​부인은 작은 목소리로 울먹이면서 짤막짤막 말을 했는데, 상담자의 도움으로 그 동안 쌓인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시댁에 비하면 저의 집이 가난하고, 그래서 시집오고 나서 이런 저런 일에 서툴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회 생활 경험이 없어서 남편을 잘 돕지 못한 것도 있었고요. 그래도 친정에서 자랄 때는 기죽지 않고 지내왔는데, 시집와서는 남편이나 시부모님이 모두 너무 무서웠어요. 저도 제가 잘 못하는 것은 아는데, 그 때마다 지적을 받고 꾸중을 들으니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첫 애가 어린아이였을 때, 남편이 회사로 무슨 서류를 가져와달라고 해서 그 때 처음 남편의 회사가 어딘지 알게 됐어요. 더운 여름날 아이를 업고 겨우겨우 찾아갔는데, 남편은 ‘왜 이리 늦었냐?’고 한마디 하더니 냥 들어가버렸어요. 저는 ‘수고했다’고 하면서 시원한 음료라도 사주었으면 했거든요.

​멍하니 회사 건물을 올려보고 있는데, 남편이 ‘빨리 안가고 뭐하냐’고 한마디 하더군요. 제가 다른 사람 눈에 띌까봐 창피했던 거 같았어요. 눈물이 났지만 그냥 돌아왔죠. 그때까지 점심도 먹기 전이었거든요”

“저도 남편과 시부모님에게 살림하는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고, 또 저 나름대로는 남편을 돕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를 안 줬어요. 살림에 필요한 돈도 그때그때 받아써야 했어요. 제 옷 사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고, ​애들이나 남편 옷을 사주고 싶어도 그럴 돈이 있어야죠. TV를 보면서 제가 무슨 말을 하면 남편은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말이냐?’고 윽박질렀죠. 이제는 아이들조차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뭐라 한다’고 대드는데, 남편이 그러니까 애들도 저를 무시하는 것 같아요.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고, 이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부부관계를 규정하는 용어 중 ‘라벨 붙이기’가 있습니다. 배우자의 부족한 점에 대해 ‘게으르다’, ‘무능하다’ 또는 ​‘냉정하다’, ‘고집불통’ 과 같은 ‘라벨’을 붙이고 나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그 라벨을 통해 평가되면서 부정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설령 잘하는 점이 나타나도 그런 경우는 ‘어쩌다 그런 것’으로 무시되고 맙니다.

이런 ‘라벨 붙이기’의 문제는 그런 라벨이 붙은 사람 자신도 어느 새 그 라벨이 규정하는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데에 더 큰 심각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피그말리온 효과’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긍정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그렇게 대하면, 점점 그에 적합한 수준의 긍정적인 행동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이가 좋은 부부나 연인들은 물론 부모-자녀 관계나 교사-학생 관계에서 분명히 관찰되곤 합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자신과 상대에 대한 만족감이 높아지고 그 사이도 돈독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남편은 다행히 이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여, 그는 자신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부인에게 칭찬과 감사 표현을 늘리겠다고 약속했고, 부인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남편의 노력과 변화로, 부인은 그 동안 누리지 못했던 삶의 보람을 찾으며 자신도 더 적극적으로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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