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워터 릴리스’(2007)는 ‘톰보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셀린 시아마 감독이 27살 때 내놓은 데뷔작으로 오는 13일 뒤늦게 국내 개봉된다. 15살 소녀 마리, 플로리안, 안나. 마리는 초등학교 동창 안나 때문에 수중 발레 구경을 갔다가 플로리안을 보고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마리에겐 안나와 노는 시간 대신 플로리안에게 접근해 그녀 곁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다. 둘은 싱크로나이즈드 선수들의 파티에 간다. 그곳에서 플로리안은 안나가 짝사랑하는 프랑수아와 키스를 한다. 안나는 밖으로 나가 울음을 터뜨리고 그럴수록 더욱 마리에게 집착하지만 마리는 더 멀어진다.

코치가 플로리안에게 집적대고 여학생들은 훈련 뒤 천연덕스럽게 바나나를 먹는 플로리안을 보고 흉을 본다. 플로리안은 마리에게 소문이 다 거짓이고 자신은 처녀라고 고백한다. 프랑수아가 자꾸 성관계를 하자고 보채는데 처녀인 걸 들킬까 두렵다며 남자를 유혹해 경험을 쌓겠다고 클럽에 간다.

플로리안이 한 남자를 꾀어 차 안에서 관계를 하려는 순간 마리가 나타나 만류하자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온 뒤 고맙다며 자신의 첫 경험 대상은 마리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플로리안의 집에 들렀던 프랑수아는 왠지 금세 안나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안나는 서둘러 그를 받아들여 잠자리를 하는데.

퀴어 영화라는 선입견은 금물! 소녀와 여자의 중간 지점에 선 세 소녀를 통해 사랑과 우정을 규정하고 선을 긋는 아름다운 동화다. 마리는 육체는 미숙하지만 정신은 성숙하다. 안나는 초등학교 때 이미 가슴이 나왔고 현재 글래머지만 사실은 비만이고 정신적 연령은 또래들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다.

플로리안은 수중 발레 실력이 뛰어나고 육체적으로도 성숙해 완벽한 몸매와 미모를 자랑한다. 그래서 남자관계가 문란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소문을 부인하지 않고 외려 긍정하며 자신이 이미 어른이 다 됐다고 거짓으로 포장한다. 마리는 그녀의 진면목이 헷갈린다.

마리가 정문이 아닌 나무 펜스 사이로 집을 드나드는 건 성장 과정이 보편타당하지 않았다는 암시다. 그럼에도 내면은 비뚤어지지 않고 조숙했다. 안나는 맥도날드에서 해피밀을 고집해 종업원에게 핀잔을 듣는다. 그녀의 몸은 이미 소녀가 아니지만 내면은 해피밀의 장난감에 집착하는 유치한 애다.

이렇게 몸과 마음, 이론과 실천, 사상과 행동 등이 엄발나는 세 소녀는 멋진 첫 키스와 첫 경험을 하고 싶고, 끈끈한 우정도 쌓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초반 플로리안 팀의 수중 발레는 우아해 보인다. 하지만 수중의 하체는 방정스러우리만치 쉴 새 없이 헤적거리고 있다.

마리는 평소 팔 근육을 늘리는 운동에 집착하고 안나는 제 팔과 마리의 팔을 번갈아 쳐다본다. 플로리안의 도움으로 그 팀의 연습 장면을 구경하던 마리는 갑자기 잠수한다. “물속이 더 잘 보여”라며. 이런 시퀀스는 여성이 사회에서 어떻게 보이도록 강요당하는지 잘 보여준다. ‘여성답다’는 게 뭔지.

한 소녀가 겨드랑이 검사에서 채 제모를 하지 못한 사실을 여선생에게 지적받자 시간이 없었다고 변명한다. 그러자 선생은 “나중에 남편한테도 시간이 없었다고 할래?”라고 질책한다.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여자 어른이 소녀를 그렇게 가르친다는 건 충격적이다.

처녀인 플로리안이 성 경험이 풍부하다는 악의적 소문을 긍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수아가 자신이 처녀인 걸 알 경우 실망하고 떠날까 봐 걱정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다른 소녀들이 자신을 질시하기 때문에 코치와 마음에도 없는 키스까지 했다. 파티에서 안나가 겨드랑이 땀을 걱정하는 것까지.

그런 아이러니는 세 소녀들이 미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리바이스, 나이키, 코카콜라, 맥도날드를 애호하는 설정과도 연결된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가 3국으로 분리된 이후 프랑스와 독일은 영원히 합쳐질 수 없게 됐다. 한때 프랑스는 영어를 경멸했고, 캐나다엔 아직도 그런 사조가 잔재한다.

그러나 그건 옛날 얘기. 양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확실히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결과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건 사실이다.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프랑스 지적 여성의 고뇌가 읽힌다. 플로리안은 클럽 화장실에서 마리와 키스한 뒤 “봐, 어렵지 않지?”라며 우유부단했던 마리에게 ‘한 수’ 가르친다.

과연 마리와 플로리안의 감정은 우정일까, 사랑일까? 많은 청소년은 이성 친구와도 우정이 이뤄질 수 있는지 의문을 갖는다. 일부 청소년은 동성끼리의 우정에서 살짝 사랑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정이 어떻든 확률적으로 오래가는 건 우정이다. 우정의 엔도르핀은 길고, 사랑의 도파민은 짧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최고의 ‘꽃소년’ 알키비아데스와 파이데라스티아(소년애) 관계였다고도 하고, 한편에선 그의 유혹에 안 넘어갔다고도 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대화편’의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친구 관계를 기각한다. 소년애는 소년이 성장해 자립하면 해제된다. 소녀들도 그럴 것이다.

플로리안의 립스틱이 묻은 자신의 입술을 수영장 물에 격하게 닦은 뒤 입수하는 마리와 그 뒤를 이어 입수한 안나가 수면 위에서 함께 부유하는 모습이 여성의 욕망적 대상화에 대한 무기력증 혹은 해탈이라면 플로리안은 도발이다. 이런 놀라운 페미니즘 영화를 고작 27살에 찍은 시아마는 천재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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