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픽사베이

[미디어파인 칼럼=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한 중년 부인이 우울증인지 염려된다고 하면서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부인은 수개월 전부터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이유 모를 눈물이 흐르며 자주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2년 전에 갑상선암으로 갑상선 절제를 받은 때문이거나 아니면 셋째인 막내가 올해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할 일은 다 끝냈다는 허탈감 때문일 거라고 했습니다.

중년기 여성의 우울증에는 폐경에 따른 신체적 및 심리적 변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특히 자녀를 모두 대학을 보내거나 막내까지 결혼을 시킨 후에 찾아오는 우울증은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마련해야 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최선의 치료를 위해서는 그 남편이나 가족들의 이야기도 들어서 지금까지의 가정생활에 대하여 충분한 검토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2남 1녀의 맏아들과 결혼한 부인은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살림이 어려워 시집살이를 자청하였고 자신도 직장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살림에 도움을 주지 않아 그녀는 온 집안의 살림까지 도맡아야 했습니다. 은근히 기대했던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시집의 생활비까지 부담해야 했고, 시동생들의 결혼에는 적잖은 돈을 대출받아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남편에게 이런 상황에 대한 푸념을 해보았지만, 남편은 “이제 와서 뭘 어떡하자는 거냐?”하거나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아, 나중에는 아예 말문을 닫고 지냈습니다.

▲ 사진=픽사베이

부인은 자녀가 세 명이 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분가를 선택했습니다. 그동안 남편이 승진하여 생활을 꾸려갈 정도의 수입이 되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는 물론 시동생들도 누가 부모님을 돌봐드리겠느냐며 분가를 반대했지만, 이번에는 남편도 묵묵히 따라 주었습니다. 분가 이후 부인은 자녀들의 교육에 전념했는데, 지금까지 시댁 식구들만을 위해 살아온 것이 억울했기 때문에 자녀들을 통해서라도 보상받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막내까지 대학에 들어가자 자기가 할 일은 모두 마친 것 같아서 갑자기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남편의 아버지는 가정에 관심이 없는 데다 경제적 능력도 없어서 어머니가 궂은일을 하며 삼 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려서부터 우등생이었다가 유명 대기업에 취업한 남편은 어머니에게 기둥이었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집안 출신의 며느리가 들어온 것을 어머니께서 심히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굳이 부인의 말을 듣지 않아도, 남편 자신이 보기에도 어머니의 요구가 지나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 때문에 고생을 했던 어머니라서 그런 식의 보상이라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부인이 고생하는 것을 못 본 체하며 그저 부인이 잘 견뎌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직장 생활에 충실하여 열심히 돈을 벌어다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인의 요구로 분가하여 가정은 안정된 모습을 찾았지만, 남편은 사실 부인과 자녀들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서 집안 일과 자녀 양육은 부인에게 일임하며 지내왔습니다. 이제 막내까지 대학에 들어갔으니 편안한 노후만 준비하면 되는데, 부인이 암이나 우울증에 걸린 것이 그동안 고생한 때문이고 따라서 다 자신의 잘못이라며 남편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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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남편이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남편은 회사 일에만 충실했고 자신에게는 아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이제 와서 관심을 보이는 것이 너무 낯설고 오히려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이제 와서 부부 관계 개선을 바라지도 않는다면서, 자신에 대한 남편의 염려가 지나쳐서 직장을 잃으면 자녀들에 대한 학자금 지원이 끊길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직장을 잃게 되는 일은 없을 테니, 아무쪼록 부인이 회복되어 온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무슨 노력이든지 기울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상담을 통해 저는 부인의 우울증에 대한 약물치료와는 별도로 부부치료를 진행하였습니다.

우선 부부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준 상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한편, 지금까지 잘 살아온 자기 자신에게도 칭찬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다음 부부의 삶에서 달라져야 할 점, 즉 남편은 바깥일 또 부인은 집안일로 지나치게 경직된 역할분담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부부간의 이러한 역할분담은 부분적으로 효율적일 수 있으나, 그것이 지나치면 기쁜 일이나 힘든 경험에 대한 가족 간의 감정 공유가 불가능하고 상호 소통이 차단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남편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사회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지만, 정작 자신의 가정에서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느낌을 종종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또 부인은 그런 남편의 진심을 받아들여서 집 안에서 남편의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동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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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자신의 감정을 어느 정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후에는 그동안의 경직된 역할에서 벗어나도록 과제를 주었습니다. 즉 남편에게 부인과 함께 장을 보고 부엌일이나 집안일을 거들도록 했습니다. 또 부인과 자녀들에게는 남편과 함께 보러 갈 공연을 선택하게 하거나 외식을 할 식당과 메뉴를 결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 후에는 서로의 느낌을 말하고 비평 없이 듣도록 했습니다.

부부 모두 처음에는 다소 어색해했지만, 점점 새로운 경험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도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남편과 함께 다니고 반찬 준비를 같이 하면서 이제야 신혼생활을 하는 것 같다며 행복해했고, 얼마 후에는 우울증 치료 약물도 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때때로 막다른 길에 도달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본인의 노력만으로 새로운 길을 찾기가 어려울 때에는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서보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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