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 칼럼=박은혜의 4차산업혁명 이야기]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유행한 것은 이미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정말로 인문학이 위기인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인문학의 위기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글로벌한 현상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과거 대학들이 덩치를 키우기 위해 돈 안 드는 인문학 학과들을 마구 양산하면서 인문학 전공자들이 지나치게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졸업생들을 우리 사회가 의미 있는 방식으로 거의 수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말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위기에 빠졌다는 다양한 목소리들은 대체로 ‘인문학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치중되어 있다. 인문학이 무엇이고, 그것이 정말 쓸모 있는 것이냐를 묻기 이전에, 정말 물어야 할 것은, ‘인문학은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여야 한다. 인문학 교육에 관한 논의는 뜬구름 잡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철저히 현실적인 기반 위에서 토론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비판적 사고를 지닌 시민을 키우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인문학 교육이라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과 인문학적 사유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마치 인문학이 사회적, 경제적 효용성을 잃어가는 듯 보이는 이러한 시대에, 인문학이 교육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문학적 사유’이다. 그럼 다시, 인문학적 사유란 무엇인가? 인문학 위기를 극복하는 출발점이 되기 위해 인문학적 사유를 설계해야 한다면, 그것은 곧 창조성과 실용성이다. 창조성과 실용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인문학적 사유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효용 가치가 있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인문학적 창조성이 지니는 독특성이 인문학적 사유를 실용적이게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가령 서양의 아이디어를 수입하기만 하지 말고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는 둥, 새로운 글쓰기를 하자는 둥의 대안은 사실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인문학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여 분석적이고 맥락적인 치밀한 사유를 키워주는 것이지, 꿈같은 상상력을 키워주거나 인격을 수양시켜주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을 배운 학생이라면 자신의 공부가 사회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고 그로부터 무슨 득을 얻을 수 있을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은 한 마디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학문이다. 중요한 점은, 같은 텍스트를 읽은 다른 사람들이 찾아내지 못한 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읽고 질문하여 자신의 해석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창조성을 가능케 하며, 이러한 창조성에 충실한 인문학이여야만 실용성 또한 획득하게 될 것이다.

창조성과 실용성을 위한 훈련과정

그렇다면 인문학적 사유를 창조성과 실용성에 기반을 두고 어떻게 훈련할 수 있을까?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면, 여기에는 세 단계의 훈련 과정이 있다.

첫째, 주어진 문제에 좋은 답을 얻는 단계이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주제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읽고 간단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는 단계를 말한다. 주어진 주제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이와 관련된 참고문헌을 도서관이나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찾은 자료들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요점을 파악하고 다른 주장들과 비교하여 각각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론, 본론, 결론의 보고서 구조를 잘 이해하고, 인용과 각주도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주장들을 기반으로 삼아 자기주장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자기주장을 설득력 있게 잘 구성하되 또한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반성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일은 비단 전문가들에게만 요구되는 능력이 아니다. 이 정도의 능력은 교양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시대가 어쩌면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일 수도 있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를 컨텍스트 속에서 이해하고, 다른 텍스트와 비교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가설을 세우고, 가설을 지지할 근거들을 찾고, 자신의 생각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제기되었는지 확인하고, 자신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을 비교하여 차이점을 찾아내야 한다. 글을 엮고, 글을 고치고, 보충자료를 읽고 글에 첨가하고, 다시 고치고. 인문학적 사유의 기초란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다. 이는 훈련을 통해 개발해야 할 치밀하고도 분석적인 정신노동인 것이지, 상상력을 꿈꾸듯 펼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흥미 있고 의미 있는 문제를 찾아내거나 만들고 이에 답하는 단계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문제를 찾아내어 그에 관한 보고서를 쓸 수 있는 단계이다. 가령 ‘인터넷 혁명이 기업 혁신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가 주어졌을 때, 그저 인터넷 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을 보고서에 담는다면 그건 아무 의미 없는 작업이다. 그러나 가령, ‘인터넷이 게이미피케이션 기법을 통한 인사관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구체적이고, 다룰만하고, 의미 있는 주제를 잡아낸다면 좋은 보고서를 쓸 수 있다.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과 가치 있는 문제를 찾아내는 것은 질적으로 분명히 다른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많은 보고서를 작성해보고, 전문가의 제대로 된 비평을 받고, 자신의 주장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청취할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한다. 인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면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모범이 되어야 하고, 최소한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다면, 이러한 둘째 단계의 수준에까지는 도달해야 한다.

셋째, 사소하게 보였던 문제를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변환하는 단계이다. 이는 가장 높은 창조성을 필요로 하는 단계로서, 대주제 안에서 좋은 소주제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대주제 자체를 찾아내는 단계이다. 소위 인문학적 대가라고 평가받는 이들의 작업이다. 흔히들 말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는 융합의 지점 역시 이 셋째 단계의 수준에서야 가능하다. 첫째나 둘째 단계의 수준에서 벌어지는 어정쩡한 만남은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다. 4차 산업혁명에서 인문학이 위기이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쓸모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수준에 도달한 전문가들의 만남이 더욱 활발해져야 하며, 당연지사 이러한 전문가들을 키우는 것으로서 인문학은 여전히 우리의 교육 시스템에 남아있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전공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인문학의 각 영역들의 구석구석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 구석들 나름의 특성을 반영한 단계가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소개된 세 단계는 그저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혹은 이제라도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고자 하는 사회인들에게도, 인문학 공부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구체적인 단계적 실천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방식의 인문학은, 분명 오늘 우리 사회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는, 어쩌면 조금은 이상한 인문학들과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박은혜 칼럼니스트]
서울대학교 교육공학 석사과정
전 성산효대학원대학교부설 순복음성산신학교 고전어강사
자유림출판 편집팀장
문학광장 등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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