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픽사베이

[미디어파인 칼럼=박수룡 원장의 부부가족이야기] 청소년 상담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문제아는 없다.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는 물론 상당히 과장된 표현이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한 어머니가 고2 딸을 데리고 와서 상담을 부탁했습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딸은 고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성적으로 상위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딸이 일류 대학의 인기학과에 갈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여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딸이 언제부턴가 소설가나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그러려면 좋은 성적보다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면서 공부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성적도 중간 이래로 곤두박질쳤습니다. 혹시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알아보았지만, 성적이 떨어진 것 외에는, 선생님이나 친구들과는 아주 밝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의 장래 희망에 대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는 하지도 말라면서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이 아깝지도 않으냐?”라고 재촉했지만, 딸은 “그건 엄마가 공부만 시켜서 그랬던 것이고,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생겼으니 내 맘대로 하겠다"라고 반항했습니다. 딸과 싸우다 지친 어머니는 아버지를 시켜서 “나중에 뭐를 해도 좋으니 일단 좋은 대학을 가고 보자"라고 설득하게도 해보았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근래 들어 어머니와 딸은 서로 얼굴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혹시 딸에게 무슨 병이라도 있는 아닌가 하면서 꼭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오랜 망설임 끝에 말문을 연 딸의 이야기는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딸은 지금이라도 공부를 하고 성적을 올리는 데에는 자신이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딸은 자신보다 오빠가 더 걱정되는데, 부모들은 그걸 모른다고 했습니다. 오빠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해서 좋은 대학을 들어갔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오빠처럼 될 것이 뻔한데, 왜 그래야 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오빠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교의 2학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부모와 따로 살고 싶어 하며 방을 따로 얻어달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집에서 충분히 통학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해줄 형편도 되지 않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그 후 오빠는 ‘방 얻을 돈’을 벌기 위해서 ‘알바’를 하느라 공부를 소홀히 하고 있는데, 딸은 부모가 그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에게 그 이유를 알고 있는지 물었더니, 오빠가 자신에게 ‘부모에게서 벗어나고 싶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공부를 좀 못해서 지방의 대학에 갈 걸 그랬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오빠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만나 현재의 가정생활과 각자의 성장 배경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고 강압적이어서 어머니나 자신의 형제들은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자신의 어머니가 순하고 희생적이어서 두 분이 크게 다툰 것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고 합니다. 결혼한 후에는 그런 어머니를 잘 모시고 싶었지만, 부인이 시댁 식구들을 멀리하고 자녀들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이 싫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싸우지 않으려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끔은 부인의 요청으로 자녀들을 혼내기도 하였지만, 아들이 중학생일 때 혼 내려다가 몸싸움까지 이어질 뻔한 일이 있은 후에는 그나마도 그만두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나 친정 형제들이 대학을 나오고 지금처럼 이나마 살 수 있게 된 것은 친정어머니의 적극적인 주도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친정아버지는 사람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현실적이지 못해서 식구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든 적이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잘 키우기 위해서 자녀가 어릴 때부터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심지어 본가나 외가 친척들과의 모임은 물론 명절 연휴나 가족 휴가도 피하려 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자신처럼 자녀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면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바에야 한 켠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엄마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자신의 자녀들이 왜 이제 와서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지 몹시 억울해 하고 있었습니다.

▲ 사진 출처=픽사베이

사례의 아들딸이 보이는 문제행동은 그 부모가 자신들의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부 모두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부모에게서 바람직한 부부 생활이나 부모의 역할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돈을 벌어다 주되 부인과 자녀에게 개입하지 않는 것, 그리고 어머니는 자녀들의 학업적인 성공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행복하지 않다는 점을 자신들은 몰랐지만 그 자녀들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부모에게 자녀의 공부보다 가정을 회복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부부에게 둘이서 영화와 외식을 각각 월 1회 이상 하도록 했고, 또 자녀와 함께 어울려 놀도록 과제를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당구를 하기로, 또 어머니에게는 딸과 연극이나 공연을 보러 다니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가정생활에 관심을 보이고 어머니가 자녀들 ‘감독’ 역할을 그만둔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자녀들의 변화가 뒤따랐습니다. 즉 딸은 자신은 밀린 공부를 할 테니 좋은 시간은 엄마 아빠끼리만 가지라고 했습니다. 또 아들은‘알바’로 방값을 버는 것보다는 학점을 잘 받아서 장학금을 받는 것이 더 낫겠다고 계획을 바꾼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이 부부가 바라던 가정의 모습이었습니다.

부부는 부모로 사는 것이 힘든 줄만 알았지, 이렇게 즐거울 수도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며 상담을 끝냈습니다.

▲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전문의 수료
미국 샌프란시스코 VAMC 부부가족 치료과정 연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현) 부부가족상담센터 라온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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