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 제공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 10일 방송된 MBC ‘다큐플렉스-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의 후폭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만약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이 사실이고, 각종 종교의 교리가 옳다면 여기서 벌어지는 상황을 어디선가 보고 있을 고 설리의 영혼의 기분은 어떨까? 그녀의 내세마저도 혼란스럽고 불편한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는 집착(안에 서다)과 불안(삶의 고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현존재(인간)는 탈존(밖에 서다)과 진리(존재자가 모습을 나타냄)로써 본래적 존재(태어나기 전의 순수한 영혼)를 맞이하는 도래적 존재(같은 영혼)를 추구했다. 가족-친지라면 고인에게 최소한 그 마중물은 돼야 하지 않을까?

‘다큐플렉스’에 출연한 고인의 엄마는 인연을 끊은 이유에 대해 14살이나 많은 최자를 사귀었기 때문이라는 뉘앙스의 증언으로 인터뷰를 했지만 그녀의 주장을 반박하는 고인의 친구 A 씨와 B 씨의 증언과 비난 글이 SNS에 올라와 뜨거운 화제에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고인의 오빠가 곧바로 이 친구들을 비난하는 글을 올림으로써 다툼의 양상이 다른 쪽으로 흐르는 듯했지만 오빠는 이내 그 글을 삭제한 뒤 친구들에게 사과하며 자신을 둘러싼 설리의 팬들에 대한 부적절한 행위를 반성한다는 듯한 암시의 글로 잘못했다는 뜻을 표시했다.

‘다큐플렉스’ 제작진은 지난해 10월 극단적 선택으로 25살에 세상을 등진 설리의 삶을 재조명하겠다는 취지로 제작했다고 한다. 방송 후 최자가 ‘죽일 놈’이 된 데 대해 이모현 PD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다며 외려 고인의 어머니가 최자를 두둔하는 듯한 코멘트를 했는데 편집했다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최자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게 만듦으로써 화제성을 높여 시청률 상승을 노렸다는 다수의 의심은 어느 정도 증거를 확보할 수도 있다. 게다가 배경에 다이나믹 듀오의 ‘죽을 놈’을 깔기까지 했으니 ‘속 보이는 편집’이라는 일각의 문제 제기는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을 듯하다.

일단 논란의 가장 큰 본질은 ‘다큐플렉스’ 제작진의 의도가 생전에 ‘관종’으로 불렸고, 꽃다운 나이에 극단적 선택을 한 설리를 순수하게 재조명함으로써 그런 연예인들이 자꾸 생겨나는 데 대해 함께 고민하고 사회적인 보호망을 어떻게든 마련해 보려 했는지가 첫 번째다.

두 번째는 고인의 가족이 고인과 절연한 진짜 이유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엄마다. 만약 친구 A 씨의 주장이 맞는다면 엄마는 얼굴 들고 다닐 자격이 없다. 아니, 고인의 엄마라고 밝힐 티끌만큼의 근거가 없다. 그렇다고 엄마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해도 역시 그녀는 당당할 이유를 상실한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고 해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우리 몸을 소중히 보존하는 게 효도의 시작이라는 가르침은 이씨조선시대에서 끝났다. 근현대화 이후에도 일부 고루한 부모가 착각으로 ‘너는 커서 뭐가 되고, 누구랑 결혼해’라고 강압했지만 이젠 그런 시대착오는 안 통한다.

자유연애의 시대다.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남들에게 떳떳한 자격을 가진 미혼 남녀의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이라면 부모로서 그 상대방의 조건이 어떻든 기혼자만 아니면 축하하고 지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걸 빌미로 가족의 인연을 끊는다는 건 부모답지 않은 치졸하고 이기적인 행위다.

오빠는 친구들에게 누명을 씌운 점과 고인의 팬들에게 음란하고 불순한 행동을 한 점을 반성하고 사과했다. 그 자세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지만 최소한 친구들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준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다큐플렉스’ 방송 후 가장 선명한 인정과 시정의 의지의 첫 사례다.

그렇다면 남은 숙제는 두 가지다. 고인의 엄마가 자신의 발언이 어디까지 편집된 것인지, 그리고 인연을 끊은 진짜 이유가 최자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 양심 선언을 하는 것이다. 정황상 이 PD의 해명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이 불분명하다. 만에 하나 거짓일지라도 정황상 진실 규명은 쉽지 않다.

따라서 엄마의 엄마로서의 책임감과 사랑으로 고인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생전의 고인을 사랑했던, 그래서 이 진흙탕 싸움을 바라보며 남몰래 가슴 아파할 고인의 팬들과 친지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도록 양심을 대상화할 때다. 칸트는 이성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평생 과제로 삼았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의 지식론,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의 행위론,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의 희망론이다. 이 원칙론, 실천론, 내세정복론을 굳이 고민하지 않더라도 고인의 인생과 영향, 인연, 사랑 등을 주고받은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기초적인 존경심은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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