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픽사베이

[미디어파인 칼럼=박은혜의 4차산업혁명 이야기] 범례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보통 학생들이 과학을 공부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쉽다. 학생들은 먼저 기본 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원리가 잘 적용되는 이상적인 예제를 풀어 해답을 제시한다. 예제를 통해 학생들은 기본원리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말하는 예제가 쿤이 의도하는 범례다. 그러나 단순히 문제풀이가 범례인 것은 아니고,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학자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론의 매우 성공적인 적용사례를 범례라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가령 자유낙하를 하는 물체의 운동법칙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의 범례가 된다. 이러한 범례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자들은 범례를 통해, 기호로 된 공식이 실제 자연세계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학습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연계의 정확한 분류방식을 터득하는 학습과정에서 범례가 사용된다. 가령 동물원에 난생 처음으로 간 꼬마가 서로 다른 동물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어떻게 배우는지 살펴보면 된다.

범례는 좁은 의미의 패러다임이다. 범례를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예는, 온 국민이 다 아는 불후의 명저 <수학의 정석>이다. 먼저 기본원리가 나오고 이를 그대로 응용한 필수예제, 그리고 여기에 숫자만 바꾼 유제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습문제가 나오는데, 연습문제 중 몇몇은 유제와 비슷해서 쉽지만 뒤로 갈수록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그럼 학생들은 연습문제와 필수예제 및 유제 간의 유사관계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 유사관계를 잘 이해한 학생이 결국엔 문제도 잘 풀게 되는 법이다. 바로 이렇게 널려있는 연습문제들을 자신들의 범례로 만들어 기본원리를 익히는 과정이 바로 과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범례를 학습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현상이 어떻게 동일한 원리의 지배를 받는가를 학습하는 것이다. 동일한 패러다임 속에서 과학자들은 동일한 범례를 공유하며, 이러한 범례를 숫자를 끊임없이 늘려감으로써 패러다임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그저 평생 연습문제나 푸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 사진=픽사베이

쿤의 대답에 따르면, 과학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 중 하나는, 어느 시기가 되면 거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놀랄만한 수준의 합의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어느 때가 되면 그 놀랄만한 합의가 한꺼번에 깨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쿤은 이처럼 공통의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를 정상과학이라 하며, 공통의 합의가 깨지는 상황을 과학혁명이라 불렀다. 과학의 역사란 정상과학이 과학혁명에 의해 생성, 소멸, 대체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럼 정상과학 안에서 과학자들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일종의 퍼즐풀이에 몰두한다. 쉽게 말해서, 과학자들은 이미 해답이 있고 해답에 이르는 방법도 주어진 상태에서 과학을 한다는 것이다. 해답이 없는 퍼즐은 없으니깐 말이다. 만약 정상과학 안에서 기존의 이론과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될까? 절대 기존의 이론은 폐기되지 않는다. 퍼즐이 잘 안 맞는 경우에 비난을 받는 대상은 사람이지 퍼즐이 아니다. 이론은 맞는데, 사람이 실력이 모자라 퍼즐을 못 맞추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쿤이 보여주는 과학과 혁명의 그림이다.

[박은혜 칼럼니스트]
서울대학교 교육공학 석사과정
전 성산효대학원대학교부설 순복음성산신학교 고전어강사
자유림출판 편집팀장
문학광장 등단 소설가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