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내달 4일 개봉될 영화 ‘도굴’은 박정배 감독의 데뷔작인 데다 라인업이 엄청나게 화려하다고 하기엔 살짝 부족하긴 하지만 외형으로만 판단하면 큰코다칠 듯하다. CJ엔터테인먼트가 지난 ‘몸비시즌’ 때 텐트폴 무비들과 맞대결하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로 화려하고, 재미있으며, 유쾌한 여운을 준다.

흙에서 보물을 읽는 천재 도굴꾼 강동구(이제훈)는 한 천년 사찰에서 불상을 훔친 뒤 장안동 고미술상가를 휘젓고 다닌다. 어둠의 세계에서 돈을 번 진 회장은 골동품 모으는 게 취미다. 자신의 건물 지하에 철옹성 같은 수장고를 지은 뒤 법과 상관없이 모은 엄청난 수와 가치의 골동품을 보관한다.

엘리트 비서 윤세희(신혜선)와 옌벤 출신 깡패 주광철은 진 회장의 오른팔이다. 세희는 진 회장이 불법으로 모은 골동품 중 일부를 해외 큰손들에게 판매하고, 광철은 주먹으로 때울 일을 해결한다. 광철은 수장고 설계자를 수장한 뒤 장안동을 뒤져 동구를 찾아내지만 오 형사의 눈에 띄어 놓친다.

광철은 진 회장을 배신한 채 동구에게 불상을 중국인에 팔아 돈을 반씩 나누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 매매 현장에 세희가 나타나 거래를 무산시킨 뒤 동구에게 2억 원을 지불하고 불상을 진 회장에게 건넨다. 동구는 세희 앞에서 보란 듯이 진 회장의 카지노에서 그 돈을 한 번 베팅으로 날린다.

그 배포가 마음에 든 세희는 중국의 고구려 벽화 도굴을 제안하고, 동구는 그 분야의 전문가 존스 박사(조우진)를 포섭한다. 둘은 중국의 조력자에게 배신당하지만 위험을 이겨내고 한국까지 벽화를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쓰러진 조력자의 휴대전화를 꺼낸 동구는 배후가 뜻밖이라 놀라는데.

박 감독은 한국 케이퍼 무비의 대표적 감독 최동훈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동구의 여동생 혜리의 과장된 캐릭터 설정만 제외하면 모든 캐릭터가 나름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삽다리 역의 임원희는 코미디 전문이란 이름값을 충분히 해내고, 조우진은 이제 연기 달인의 경지에 근접했다.

벽화를 들고 진 회장을 만난 동구는 거물인 진 회장보다 더 담대한 배포를 자랑하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때 휘두른 ‘한국의 엑스칼리버’ 전어도를 거론한다. 이 전설의 검은 강남 한복판 선릉 안에 보관돼있으니 자신이 도굴해 바치겠다며 100억 원을 요구한다. 야심찬 진 회장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동구의 특별한 능력은 흙의 맛을 감별하는 것. 그는 어렸을 때 도굴꾼인 아버지와 함께 무덤에 묻혔지만 극적으로 살아났다. 그래서 그는 흙에서 시체 썩는 맛을 읽어내고,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판단해낸다. 흙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지론을 가진 그는 만물의 근원을 흙으로 본 헤시오도스다.

헤시오도스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그리스 신화를 통일해 정리한 ‘신통기’로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또 ‘일과 날’을 통해 노동을 찬양하며 노동 윤리의 전범을 제시한다. 동구는 진 회장 같은 사악한 권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정직한 노동과 정의가 갖는 의미에 대해 웅변한다는 점에서 헤시오도스다.

남자란 자신을 믿는 이에게 목숨 바치는 동물이라는 그의 주장에서 진한 의리가 묻어난다. 이기심이 출렁대는 자본주의 사상의 물결 속에서도 고고한 대의명분으로 닻을 내려 중심을 잡은 그가 한국에서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일을 하면 내 집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도굴꾼이 됐다는 건 서글프다.

인류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아르케)을 물로 봤다. 선릉 도굴 중 딜레마에 빠진 동구 일당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건 비. 지하에 땅굴 파는 작업에 필요한 건 조명과 폭발물(불), 그리고 공기다. 이로써 엠페도클레스가 시작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지한 4원소론이 완성된다.

진 회장이 녹슨 전어도에 100억 원 이상의 무궁무진한 값어치를 부여하는 이유는 조선 건국의 상징성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꿈꾸는 극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자다. 그 사상이 궁극에 달하면 독아론이 되는데 영원한 친구를 안 믿는 진 회장이 그걸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인트로의 아버지(주진모)의 도굴 확인 시퀀스부터 오 형사를 비롯한 모든 주연과 조연의 언행이 그냥 허투루 등장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시나리오의 힘이 강하다. 플롯은 복잡하지만 혼란스럽거나 어렵지 않아 끝에 자연스레 매조진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식의 동구의 도전은 카타르시스를 준다.

불법을 저지를지언정 우리 문화재를 외국에 반출하지 않는다는 애국정신(?)은 아이러니컬하지만 그래서 재미를 준다. 맥거핀 케이퍼 무비지만 액션도 볼 만하고, 특히 동구, 존스 박사, 삽다리의 코미디가 폭소와 흐뭇한 미소를 동시에 유발한다. 시간과 돈이 절대 아깝지 않을 팝콘무비의 전형이다.

일제강점기 때의 사업가 겸 문화재 도굴꾼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초코파이와 함께 수미상관을 이루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데뷔 감독이지만 철저한 상업영화적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민족정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꽤 영리하다. 우리는 아직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숙제를 안고 산다.

감독과의 두뇌싸움 속에서 웃고 긴장하다 보면 러닝타임이 금세 지나간다. 결국 삽다리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체제하에 산다’면서도 ‘착하게 살자’로 마무리할 즈음 왜 역사가 중요한지 오구라라는 키워드로 강한 교훈을 준다. 전형적 패턴이 매끄럽게 미끄러져 유동적으로 흐르는 게 미덕.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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