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박지완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 ‘내가 죽던 날’은 미스터리 형식으로 펼쳐지지만 엄청난 눈물을 유발한 뒤 상쾌한 희망의 훈풍을 불어줄 애틋하고 따뜻한 내용이다. 여고생 세진(노정의)은 부잣집에서 자랐지만 사업가 아버지가 밀수로 입건된 후 사망하고 오빠는 마약 범죄로 수감돼 고아가 된다.

엄마와 일찍 헤어진 아버지는 정미라는 젊은 여자와 내연의 관계였고, 그녀는 세진을 친딸처럼 다정하게 대했지만 사건 이후 잠적했다. 검찰과 경찰은 사건의 주요 증인인 세진을 ‘보호’하기 위해 전라도 외딴섬에 보낸다. 그런데 폭풍이 심하게 치던 어느 밤 세진은 절벽에 유서를 남긴 채 사라진다.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라는 평가를 받았던 형사 현수(김혜수)는 그러나 사건 현장 출동 때 교통사고를 낸 뒤 잘못을 은폐하려 팔에 자해를 가했다는 오해와 더불어 사생활 문제로 정직됐다 복직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녀의 상사는 세진의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그 사건을 종결짓도록 그녀에게 맡긴다.

섬에 들어간 현수는 세진이 6개월간 살았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그 집의 주인 순천댁(이정은)이 나타난다. 집의 원래 주인인 남동생이 죽자 코마 상태인 조카 순정을 순천댁이 제 집에 데려와 돌보고 있고, 빈집에 세진을 살게 했던 것. 순천댁은 순정을 지키려다 목소리를 잃었다.

순천댁은 섬 주민 중 세진과 제일 가까웠을 법한데 별 정보를 주지 못한다. 주민들까지 인터뷰한 현수는 육지로 돌아와 세진을 담당했던 경찰 형준과 선영을 만난다. 형준은 퇴직했고, 선영은 출산 휴가 중인데 뭔가 미심쩍다. 자취를 감췄던 정미까지 찾아내지만 상사는 자살로 종결하라 명령하는데.

관객과의 두뇌 싸움을 위해 여기저기 그물을 투척한 다소 과한 의욕만 제외하면 정말 뛰어난 데뷔작이다. 김혜수와 이정은의 발군의 연기 솜씨가 탄탄하게 중심을 잡아 주는데 특히 눈빛과 얼굴 근육으로 대부분을 연기한 뒤 후반에 치찰음의 탁성으로 몇 마디를 이끌어낸 이정은은 전범이 될 듯.

김혜수는 드라마의 3분의 2 이상을 오롯이 홀로 이끄는데 전혀 지치지 않고 외려 시간이 흐를수록 에너지가 넘친다. 그리고 방점을 찍는 이정은과 시원한 희망의 여운을 주는 노정의가 인상 깊다. 극의 전체에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가 다투고 협력하는 분위기가 흐른다.

세진은 부잣집에서 아쉬울 것 없이 살았지만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잘은 모르지만 아빠와 오빠가 나쁜 사람인 건 인정한다.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인지라 고립된 섬 생활이지만 살고 싶긴 했다. 할머니 즈음의 나이에 제 자식도 아닌, 코마의 조카딸을 돌보며 사는 순천댁의 희망은 뭘까?

있기는 한 걸까? 공무원들이 순정을 요양원에 보내려 하자 그걸 막기 위해 양잿물을 마시고 시위하는 바람에 목소리를 잃을 만큼 순정을 데리고 있으려 한 이유는? 현수의 잘나가는 남편은 외도를 했다. 그래서 현수도 맞바람을 피웠다. 이혼조정 소송 중인데 언론과 밀접한 남편이 매우 유리하다.

그녀의 변호사는 “싸울 준비 안 된 의뢰인이 더 힘들다”고 토로한다. 그녀는 교통사고 후 왼팔이 마비되자 응급조치로 자해를 했는데 조직은 그걸 오해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복직하면 다 잊을 수 있을까?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라고 계속 질문하고 회의하며 사는 게 그녀의 일상이다.

그녀의 어질러진 집에 와 본 친구는 경악하며 “밥은 먹었냐”고 한숨을 내쉰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현수는 수면제를 먹고 간신히 잠이 들면 똑같은 꿈을 꾼다. “이 집에서 매일 내가 죽는데 아무도 안 치워 줘”라며 잠마저 고통임을 호소한다. 내내 음습한 화면과 침울한 분위기에 염세주의가 넘친다.

그냥 빨리 자살로 마무리하고 복직에만 전념하면 될 현수가 사건에 집착하는 이유는 CCTV를 통해 본 세진에게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오빠라는 인간은 오직 세진이 숨겼을 것만 같은 아버지의 고가의 유품과 세진의 사망보험금에만 관심 있을 뿐 그녀의 자살의 이유를 밝히는 데 흥미 없다.

이렇듯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아 유리된 세진은 자신을 보호한답시고 감시하는 CCTV 앞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그 모습에 현수는 지난 1년 동안 거울에서 본 자신을 투영한다. 현수는 세진이 과거와 현재의 자신과 닮았다고 본다. 인생사에 회의적이었던 그녀가 실존주의로 나아가는 계기다.

하긴 대표적인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조차 인간의 본질은 사유나 이성이 아닌 의지에 있다고 봤으니. 제목은 반어적 표현이다. 자신이 어떻게 자기가 죽던 날을 거론할 수 있을까? 게다가 시제가 과거다. 그건 만사에 패배적이고 부정적이었던 자신을 버리고 실존주의로 거듭난다는 뜻이 아닐까?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은 타협이나 종합이 아닌 ‘이거냐, 저거냐’의 선택과 거절(포기) 모두다. 그의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불안 속에서 단독자로서 우뚝 섬으로써 과거의 퇴락적 삶을 되돌아보며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직시할 수 있다’고 했다. 현수는 불안에서 자유로 간다.

그녀는 “나는 그동안 계속 도망 다녔다. 다 내 잘못인 줄 알고. 하지만 이젠 싸울 것”이라고 외친다. 순천댁은 그르렁거리는 소리로 “아무도 안 구해 줘, 네가 구해야지. 인생 네 생각보다 훨씬 길어”라고 말한다. 전영록의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와 별 스티커가 의미심장한 수작. 12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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