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나이스 걸 라이크 유’(크리스 리델, 닉 리델 감독)는 요즘같이 우울한 때에 어른들이 키득키득 웃으며 가볍게 즐길 만한 로맨스물이다. 하버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루시는 금발에 미모까지 그야말로 지성과 외모를 겸비한 완벽에 가까운 여자다. 그런데 애인 제프는 그녀에게 얹혀산다.

어느 날 제프는 루시가 섹스에 별로 관심이 없다며 이별을 통보하고 짐을 싼다. 루시는 50대 유부녀 프리실라, 30대 자유연애녀 네사, 미혼남 폴 등과 함께 쿼텟을 결성, 결혼식 등에서 연주한다. 이 동료들에게 자신의 실패한 연애사를 털어놓고 조언을 청한다. 폴이 결혼식 연주 일을 가져온다.

그런데 네사와 루시는 신랑의 들러리 그랜트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루시는 화장실, 성인용품 가게 등에서 우연찮게 그랜트와 자꾸 부딪치더니 결국 저녁식사를 하게 된다. 그랜트 역시 루시가 싫지 않은 눈치. 사실 루시는 제프에게 차인 뒤 성적인 ‘지식’을 쌓기 위해 리스트를 쓰고 실천 중이다.

드디어 루시는 자신의 집으로 그랜트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지만 다음날 허둥지둥 집을 나간 그랜트는 왠지 연락이 없다. 그제야 집안에 성인용품투성이인 것을 깨달은 루시는 자신의 경박함을 후회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폴이 총각파티를 하러 라스베이거스로 간다고 하자 루시도 따라나선다.

루시는 S 리스트를 거의 실천했는데 후반부에 매춘업소 방문이 있다. 그걸 경험하기 위해 폴과 함께 업소에 들어가지만 폴이 먼저 도망치는 바람에 그녀도 그냥 나온 뒤 홀로 클럽에서 하버드 동창을 만나 만취한 채 록 밴드와 협연을 한다. 그녀에게 박수가 쏟아질 때 갑자기 그랜트가 나타나는데.

로맨틱 코미디는 기승전결이 가장 뚜렷한 장르다. 루시는 제프와 헤어지자마자 그랜트를 만나고(기), 둘은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오해가 생겨 거리를 두게 된다(승). 루시는 그랜트와 소원해진 데다 그토록 원하던 교향악단 오디션에서 떨어지자 자포자기 상태에서 술 마시고 연주한다(전).

그랜트는 루시가 섹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데다 임산부라고 오해했음에도 고민 끝에 결국 그녀에게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모든 오해를 풀고 해피엔딩을 맞는다(결). 이렇듯 천편일률적이고 결론이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주연 루시 헤일의 매력 등 미덕이 많다.

헤일은 이름까지 같은 주인공의 성격이나 스타일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가운데 매력을 뿜어내며 관객을 사로잡을 태세다. 또한 이 작품은 여성의 성적 자율권, 혹은 우선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페미니즘적이다. 뭣하나 내세울 게 없는 제프는 단지 성적으로 무감각하다는 이유로 루시를 떠난다.

헤어지자마자 새 여자를 만난 그는 루시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며 연주를 부탁한다. 그 이유는 피앙세의 부유함을 자랑하기 위해서다. 이 얼마나 못났는가! 다른 여자 같으면 기분 나빠서라도 거절했을 그 제안을 루시는 흔쾌히 받아들인다. 프로정신이다. 감독은 꽤 노골적으로 여성주의를 강조한다.

루시는 제프에게 차이기 전까지만 해도 포르노는커녕 야한 소설 한 편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지적인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이별 후 달라졌다. 아니,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섹스 리스트를 만들어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야한 경험들을 의도적으로 체험하며 온몸에 잠재된 성적 세포들을 깨운다.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쾌락주의자라고 했다. 비슷한 시기의 제논이 만든 금욕주의자인 스토아학파와 대척점에 섰을 법한 이 에피쿠로스는 그러나 알고 보면 스토아학파와 유사하다. 그가 추구한 쾌락은 육체적이나 동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그래서 매우 정적인 쾌락이다.

그는 1년 내내 빵만 먹고살았고, 잔치 때 치즈를 먹었다고 한다. ‘자기만의 쾌락 추구’가 이상이었던 그의 정관(精觀, 현상계 속 본체적인 것의 심안적 투영)은 우정이었다. 제프보다 쿼텟 멤버들과 더 친했던 루시다. 그녀가 비로소 성을 깨우치겠다고 노력하는 건 단지 육체적 쾌락 추구는 아니다.

프리실라가 평가했듯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그녀는 천재다. 오디션 때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했고, 우렁찬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그건 라스베이거스 클럽에서의 록 밴드와의 멋들어진 협연과 같은 맥락이다. 그녀는 점잖은 교향악단과 어울리지 않는 크로스오버적인 인물이다.

시작부터 화장실에서 ‘고추’를 외쳐대고, 성감 향상을 위해 케겔 구슬을 활용하는가 하면, 성인용품 가게에서 다양한 용품들을 쇼핑하는 루시의 ‘S 학습’은 자칫 화장실 유머로 전락할 법도 하지만 헤일의 통통 튀는 매력과 세련된 연출 솜씨가 적정한 선을 유지시켜 준다. 청소년 관람 불가. 1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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