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런’은 ‘서치’(2017)로 국내(2018) 관객 295만여 명을 동원하며 성공적인 데뷔를 알린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미혼모 다이앤이 선천적 중증 장애인 딸 클로이를 출산한 뒤 17년. 휠체어와 네블라이저에 의지하고, 많은 약을 복용하는 클로이는 워싱턴대학의 입학통보서를 기다린다.

교사인 다이앤에게 잘 교육받은 이유도 있지만 클로이는 물리학, 화학 등에서 특히 돋보이는 수재다. 다이앤은 심한 당뇨병을 앓는 클로이가 저혈당이 왔을 때를 대비해 초콜릿 등을 사 온다. 그녀가 전화를 받는 사이 클로이는 더 많은 초콜릿을 확보하기 위해 쇼핑 봉투를 뒤지다가 엄마의 약을 본다.

그런데 그날 저녁 엄마가 건넨 알약들 사이엔 낮에 본 그 초록색 약이 있어 엄마에게 “엄마 약이 아니냐”고 물어보지만 엄마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뭔가 의심스러운 클로이는 엄마의 눈을 피해 선반에서 자기 약통 중 하나를 꺼낸다. 그런데 자기 이름이 적힌 스티커를 떼니 엄마의 이름이 드러난다.

스티커에서 트리곡신이라는 성분을 발견한 그녀는 밤에 몰래 엄마 컴퓨터로 검색하지만 인터넷 접속이 안 된다. 다음날 아침. 다이앤은 전화로 인터넷 서비스 센터와 다툰다. 통화가 끝나고 다이앤은 클로이의 말에서 그녀가 인터넷 접속이 안 되는 걸 알고 있다는 걸 깨닫자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다이앤이 뭔가 숨긴다고 의심한 클로이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한다. 영화 상영 중간 즈음 클로이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극장 앞의 약국으로 휠체어를 달린다. 초록색 약을 약사에게 건넨 클로이는 약사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듣고, 다이앤이 곧바로 나타나자 정신을 잃는데.

일단 빠른 전개와 그리 길지 않은 컷이 시원시원하다. 군더더기가 없어 감상하기에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 감독은 ‘서치’에서 청소년 딸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와 사회 불안 장애를, 그리고 그로 인한 아버지의 경계선 성격장애를 공포의 근간으로 삼았다면 이번에는 가스등효과를 소재로 했다.

이른바 ‘다 네가 잘되라고 이러는 거야’다. 최소한 3000년 이상 된 그리스의 오르페우스교로부터 엠페도클레스-플라톤-프랜시스 베이컨-니체에 이르기까지 ‘동굴의 비유’라는 세계관이 이어졌다. 우리가 보는 현상은 동굴 속 불빛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란 인식론으로 ‘매트릭스’도 그 사상을 참조했다.

우리가 믿고 있던 아주 평범한 일상과 현실이 만약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이런 공포는 이미 ‘트루먼 쇼’(1998)나 ‘아일랜드’(2005) 등에서 충분한 충격을 준 바 있다. 즉 ‘매트릭스’의 네오가 모피어스를 만난 뒤 진실을 알게 됐을 때의 그 경악과 전율일 터인데 ‘런’이 그런 재미를 준다.

‘서치’처럼 아주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그리 많지 않은 예산으로 촬영했지만 그 충격적인 플롯만큼은 엄청나게 발전시킨 감독의 솜씨는 더욱 진전을 이뤘다. 클로이는 휠체어가 없으면 한 발짝도 옮길 수 없는 하반신 마비인데 제목이 런이다. 극장 문을 나설 즈음 이 중의적인 표현에 놀랄 듯.

모녀가 사는 집은 외딴 단독주택이고, 다운타운이래 봐야 옷깃 스치는 대부분이 지인일 정도로 좁은 시골. 옆집 숟가락 개수조차 알 법한 이런 곳에서 철저한 주작을 통한 조작이 버젓이 통용된다는 설정 역시 섬뜩하다. 클로이는 타인에게 호소하지만 다이앤은 바뀐 약의 부작용 때문이라 해명한다.

과연 엄마를 의심하는 딸의 심리에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면 딸에 대한 엄마의 애정이 다른 쪽으로 어긋난 걸까? 천변만화하는 다이앤의 표정과 공포에 질려 의심하는 클로이가 허둥지둥 달리는 데서 충분한 긴장과 이완의 재미가 보장된다. 왜 클로이의 주치의는 6년간 10여 명이 바뀌었을까?

다이앤의 가스등효과에 반발한 클로이의 저항의 심리에서 발생한 부메랑효과 역시 ‘서치’가 연상되는 심리학이다. 과연 다이앤의 등의 흉터의 의미는 뭣일까? 모녀 역을 각각 소화해낸 사라 폴슨과 키에라 앨런의 연기력이 대단한데 특히 마지막 시퀀스는 숨이 막힐 정도다. 15살 이상. 20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스포츠서울 연예부 기자, TV리포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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