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는 종교…종로 곳곳에 찍힌 천도교의 발자취 [문화지평 답사기]

전수정 칼럼니스트l승인2020.11.24l수정2020.11.2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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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 칼럼=전수정의 서울 프롬나드] 오랜만의 걸음이 어색하다. 이르다고 보긴 힘든 아침 9시 지하철은 한산했다. 장기간 이어진 코로나 시국에 이제는 몸과 마음이 풀어진 듯도 하지만 여전히 스스로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며 사람들은 조심 또 조심을 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물론 외국인들까지 하염없이 몰려들던 안국동 일대의 고요한 풍경도 낯설었다. 약속 시각 10시를 목전에 둔 상황이므로 부지런히 출발 지점인 조계사 우정총국을 향해 움직였다. 노상 울려 퍼졌을 불경 외는 소리가 여느 날과 날리 은은함을 넘어 웅장함을 뽐냈다. 신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건물을 감싸고 빙 둘러 앉아서는 불경 외는 소리에 맞춰 저마다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이 또한 코로나로 한동안 중단됐던 법회의 재개였으니, 비록 내가 믿는 종교는 아니나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지는 듯도 했다.

오늘의 답사는 종로구 일대 천도교의 흔적을 살피는데 주력했다. 지금이야 서울의 범주가 어마어마하게 확장됐으나, 예전에는 현재의 종로구와 중구만이 사대문 안에 속했다. 흔적은 사라졌지만 이야기가 남아 이를 기억해야 하는 장소마다 표지석을 세우는데, 80% 이상이 종로구와 중구에 존재한다. 이 지역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리라. 출발 지점인 조계사만 해도, 사실 조계사와 천도교는 별개나, 세월이 느껴지는 회화나무 하나만을 놓고도 한동안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 작정하면 하루 종일도 답사가 진행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순간순간 늘어지지 않으려 스스로를 재촉해가며 이동에 이동을 거듭한 끝에 오후 1시가 되기 전 계획했던 마지막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최고의 수확은 천도교라는 종교를 접한 것이다.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래도 이번에 약간이나마 관심을 갖게 됐기에, 다음이 주어진다면 그 땐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게 가능하리라고 기대한다.

조계사 바로 뒤편인 보성사터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는 아담한 공원인 이곳에 인쇄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살짝 믿기지가 않았다. 인쇄소 부지치고는 좁아 보여서였다. 허나 서울은 짧은 시간동안 상전벽해와도 같은 변화를 겪어왔다. 오래 전엔 아마도 드문드문 들어선 야트막한 집들이 전부였을 테니 인쇄소, 아니, 그보다 더 큰 면적을 자랑하는 무언가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보성사는 천도교가 운영했던 활판업체이며,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걸로 널리 알려졌다. 지금이야 컴퓨터로 타자를 치고 인쇄 버튼 하나 누르면 바로 출력이 이루어지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여도 일일이 조판 작업을 한 끝에 인쇄를 할 수 있었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조판작업은 아직은 변절하기 전, 육당 최남선이 운영했던 신문관에서 이루어졌다.

인쇄를 도맡은 보성사는 기미독립선언서 인쇄 작업을 족보 편찬 작업으로 위장했다. 밤새 윤전기를 돌린 끝에 2월 25일 1차로 2만 5천장을 인쇄했으며, 27일에는 1만장 추가 인쇄에 돌입했다. 보성사를 출입하는 요주인물들을 사찰 중이던 일본 고등계 형사 신승희에 의해 독립선언서 인쇄 작업이 발각돼 위기를 맞이했으나 보성사 사장 이종일이 5천원(오늘날로 치면 억대 금액에 해당)이라는 거금을 쥐어줘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움이 어디 이 뿐이었겠는가! 참으로 힘들게 준비했을 3월 1일이건만, 이후의 흐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 피할 수 없었고 필요한 저항임이 분명하지만 무엇보다도 컸던 일반 민초들의 희생이 뼈아프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요즘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핑크뮬리가 분홍빛을 뽐내는 조계사 입구를 지나쳐 건너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시천교. ‘교’라는 단어가 붙은 게 무언지는 몰라도 듣자마자 종교려니 생각했다. 시천교는 일진회를 이끌었던 이용구 등이 천도교 측으로부터 제명을 당하자 창시한 종교다. 일진회가 친일단체로 널리 알려졌듯 이용구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을 올렸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가 원했던 합방은 일본과의 대응한 관계를 유지한 합방이라고 했다. 자신이 설정한 이상향을 이루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나 일제에 의해 일진회가 해산 당하자 속았음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과연 그의 친일 행동을 정당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지 싶었다. 그에겐 순진함일지라도 역사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그의 행동은 부인이 힘든 친일이다.

터가 품은 기운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시천교당터였던 장소에는 현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서울중앙교회가 들어서 있었다. 믿음의 대상은 다르지만 무언가를 믿는 간절한 마음이 오래도록 이곳에 모여 왔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시천교당터가 다른 종교에 자리를 내어줬다면 이번에 찾은 사동궁터는 주차장 모양을 띠고 있었다. 사동궁터는 의친왕 이강공이 거주했던 곳이라 했다. 나라가 멸망한 상황에서 황실 후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는, 그는 이강이라는 본명보다 의친왕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나라가 망하면 백성은 설움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한다. 황실 가족의 경우에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들은 일본 왕족으로 대우를 받으며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지장이 없는 생활의 영위가 가능했다. 아직은 왕을 국가 마냥 인식하는 전근대적 시선이 주를 이루고 있던 시기다. 일제는 조선 황실에 해코지를 가했다가는 식민 통치가 흔들릴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 끝에 그와 같은 전략을 구사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종이 호랑이짝이어도 황실 가족이 식민 통치에 우호적인 게 반대의 경우보다는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의친왕의 행보는 남달랐다고 한다. 그는 전국민의 82%가 응한 창씨개명에 거부한 인물이었다. 1940년 행해진 창씨개명에 불응한 이들은 자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비록 지금의 나는 비루해도 자녀만큼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길 바라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고로 웬만큼 곧은 심지가 아니고서야 쉽지 않은 결단이다.

그는 1955년 사망했다. 조국의 독립을 보았으니 광복 전에 돌아가신 분들에 비한다면야 사정이 나았다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사인은 다름 아닌 영양실조였다. 서촌 일대에 어마어마하게 드넓은 땅을 소유하고 평생토록 빈곤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이완용, 윤덕영 등의 친일파를 떠올리면 어딘가 모르게 서럽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뒤틀린 역사에 대한 단죄는 필수다. 친일 청산은 여전히 과제로만 남아 있으니, 독립운동가 자손의 대학 진학률이 고작 30% 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의친왕은 고종과 순종의 무덤으로 알려진 남양주 홍유릉에 잠들어 계시다. 홍유릉에는 능(陵) 2기, 원(園) 2기, 묘(墓) 7기가 있다. 흥선대원군의 묘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으니, 남양주시 일대에는 무려 4대의 황실 가족이 잠들어 있는 셈이다.

참고로,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며, 원은 세자, 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을 의미한다. 그 외에는 묘로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광해군, 연산군 등 왕에 올랐다가 군으로 강등 당한 이들의 무덤도 묘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연산군묘가 왜 연산군묘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을 들으며 뒤늦게 깨달았다.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장소인 경인 미술관(박영효 집터)을 잠시 둘러본 후 민병옥 가옥 옆을 스쳤다.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의 작품으로, 노원구 월계동에 있는 각심재와 똑같은 구조를 지녔다고 했다. 아버지(민대식)가 두 아들(민병옥, 민병완)이 싸우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같은 집을 지은 모양인데, 한 채는 사대문 안인 반면 다른 한 채는 지금은 서울이나 당시엔 깡촌(?)이었을 곳에 있는 까닭이 궁금했다.

민병옥 가옥은 결혼식, 돌잔치 등을 열 수 있는 ‘민가다헌’이라는 이름의 한식 음식점이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도 영업을 했던지 인터넷에 ‘민가다헌’을 치면 기사, 글 등이 제법 여럿 등장한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시도민속문화재 제15호’라고 적힌 안내 표지판만이 우리 일행을 반겼다.

가장 많은 이야기가 오갈 장소인 천도교중앙대교당이 이내 나타났다. 답사를 출발할 때 받은 지도에는 ‘천도교중앙대교당, 수운회관, 이종일집터,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라는 기나긴 명칭이 기재돼 있었다.

서울 곳곳에 터를 잡고 교세를 확장해온 천도교가 이곳에 본거지를 마련한 건 1921년이다. 현재도 볼 수 있는 두 동의 건물 외에 대신사출세백년기념관, 즉 수운 최제우 선생 세상에 태어난 지 100년을 기념하는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고 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를 담당했으며, 시공은 중국인 장시영이 맡았다. 당대 전형적인 건물 양식과는 다른 생김새의 건물로, 일명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으로 불린다고 했다. 첨탑 부분의 뾰족함은 바로크 양식과 닮은꼴로, 어느 하나의 양식으로 규정하기가 힘들지 싶었다.

전반적으로 은은한 붉은빛을 띤 벽돌이 주 재료였다. 중간중간 창신동 석산에서 가져왔다는 화강석이 사용되기도 했다. 1층은 전체가 예배당이라면 2층의 일부(약 80평 가량)는 사무실로 사용 중이다. 듣자하니 종탑에 오르는 계단이 으뜸이라는데, 일반인에게는 개방을 않는다고 하였다. 입장이 허락된 1층 예배당의 문을 열고 잠시 들어갔다. 꽤 넓은 면적의 공간에 기둥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의 기술로도 이와 같은 공간의 구현이 가능했다는 게 신기했다. 주예배당은 대부분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천도교의 예배당은 상대적으로 수수했다. 좌우측 창 상단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금은 밋밋해 보이는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모금 활동 덕에 건립이 가능했다. 짓기 시작한 시점이 1918년인 점이 독립운동 자금 모금의 목적도 어느 정도 띠지 않았을까 라는 짐작을 불러 일으켰다. 실제로 모금 총액이 100만원이라면 교당 짓는데 27만원 가량이 쓰였고, 나머지는 거의 다 독립운동 쪽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말도 있다. 이즈음 되니 천도교는 종교일까 운동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불교도 기독교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원체 타자의 시선을 하고 살아온 탓인지 이들 종교에는 친숙함을 느끼곤 한다. 반면 천도교라 했을 땐 우선 관심이 안 선다. 알고자 하는 마음 자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하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정확히 이해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으나, 개개인의 마음에 ‘한울’ 님이 존재하는 만큼 하늘을 섬기는 마음으로 내 자신을 존중하고 남 또한 배려해야 한다는 게 천도교의 기본 교리인 듯했다. 생존을 위해 경쟁에 자발적으로 뛰어들고, 그 과정에서 타인을 배척하는 일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이보다 절실한 무언가가 또 있을까 싶었다.

천도교중앙대교당 옆으로는 수운회관이라는 글씨를 품은 기다란 건물이 있었다. 높이가 16층이라고 했다. 1970년대에 청와대로부터 그리 많이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이토록 높은 건물이 들어서는 일은 아마 쉽지가 않았을 거다. 이 대목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최덕신이다. 제7대 천도교 교령이기도 했던 최덕신과 박정희의 관계 때문에 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훗날 최덕신은 월북을 했다. 모르긴 몰라도 권력이 지닌 비정함은 이 땅에서 모든 걸 누린 사람에게도 평등하게 적용되는 모양이다.

건물 앞에는 ‘궁을장’이 새겨져 있었다. 천도교를 상징하는 문양이라고 보면 좋을 듯. 각각의 부분이 뜻하는 게 몸, 마음, 성품, 소통이라는 말에 나는 작은 세계를 떠올렸다. 모든 요소가 고루 균형을 이룬다면 진정 평화로울 수 있을 텐데, 일제 강점기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들 간의 조화는 요원하지 싶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확인이 어려우나 이 일대에 이종일의 집터가 있었다는 말과 더불어 소파 방정환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곳은 천도교 성지(?)이면서 동시에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이기도 했다. ‘어린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도입한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 신도이자 손병희 선생의 사위였다. 그는 각종 활동에 지나치게 매진한 나머지 30대 초반에 요절했다. 여기에는 과도할 정도로 음식, 특히 설탕을 즐겨 섭취했던 그의 식습관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40년대 종로 경찰서가 있었다는 서울노인복지센터와 신간회 경성지회 자리라는 안국동 우체국, 천도교 2대 교령인 최시형의 단골 병원이었으며 우리나라 감염학회를 만든 임명재 원장의 병원이기도 했던 안동의원의 위치(현 걸스카우트 연맹회관)를 살포시 응시한 후 골목 안으로 다시금 들어섰다.

감고당길이라는 도로명 안에 살아 있는 감고당인쇄소를 상상하며 들어선 곳에서 만난 표지석에는 ‘조선어학회 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천도교는 출판업, 인쇄업 등 문화와 연관 있는 다수의 활동에 참여했으며, 잡지 ‘개벽’을 발행하기도 했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든 감고당인쇄소는 1920년대 천도교가 운영했던 인쇄소로 6.10만세운동의 전단지의 인쇄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6.10 운동 자체가 천도교가 주도한 운동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천도교단이 겪었을 탄압이 상당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했다.

우리가 선 바로 옆으로는 윤보선 대통령 가옥도 있었다. 자연스레 윤보선 家와 천도교에 얽힌 이야기도 등장했다. 그의 아버지 윤치소가 소유했던 땅이 지금 수운회관이 위치한 자리라고. 땅을 팔고 사면서 그곳이 우리 역사에 의미 있는 공간이 되리라고 생각한 이가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서로 동떨어진 것만 같은 이야기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지는 게 역사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어느덧 답사는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다. 길가에 있는 박물관 건물 앞에 놓인 표지석이 의암 손병희 선생의 집터임을 내게 알려 왔다. 독립선언서의 인쇄가 발각된 직후 이종일이 손병희 선생을 찾아 급박하게 이동하며 택한 길이 오늘 내가 걸은 길이었을까. 해월, 의암 등 천도교 지도자들의 이름 앞에 붙은 호가 앞선 지도자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난 이제껏 내가 걸어온 길을 복기하는데 치중했다. 다음번에 과연 혼자 올 수 있을지. 앞서 최린 선생의 집터 방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혼자 이곳을 찾을 자신이 없었다. 아니, 걷다 보면 장소에야 도달할 수 있을 테지만, 길 위에 이야기까지 입혀 가며 걸을 자신은 도통 나질 않았다. 방대한데다 생소하기까지 한 이야기에 파묻혀 보낸 시간은 그만큼 행복하고도 버거웠다.

한결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는 마지막 장소로 향했다. 노틀담 교육관. 손병희 선생의 뒤를 이어 천도교를 이끈 4대 교령 박인호 선생의 집터에서는 천주교의 향기와 품격이 느껴졌다. 앞서 시천교당터가 그러하듯 이곳 역시 믿음의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 중이었다. 손병희 선생에 비해 박인호 선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아침 7시에 조반을 먹은 그가 불과 1시간 후인 8시엔 스승 손병희 선생과 다시 한 번 조반을 먹었다는 일화가 천도교에 관해 이날 들은 마지막 이야기였다.

12시 40분이었나 그랬다. 슬슬 허기를 느끼며 안국역 쪽으로 이동했다. 이동 도중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던 박흥식 집터 쪽으로 뻗은 골목을 따라 걸었다. 그 옛날에 백화점을 경영했다면 지닌 부가 어마어마했을 거다. 비록 말년까지 성공일로를 걸은 건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부유해지길 바라며 이곳을 거닐었으리라는 상상이 갔다. 한 편으로는 부가 가난보다 낫기야 하겠지만 행복과 동일어는 아닐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2001년 3월 작고하기 전까지 잠시 이곳에 거주했다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만 보아도 말년이 외로웠다. 값진 소나무가 늘어선, 대지 면적 2,324㎡을 자랑하는 저택이 과연 그에게 어떠한 위안을 선사했을지.

생각은 권력으로도 향했다. 아마도 최린 집터 쪽을 바라보면서였을 거다. 많은 지도자격 인물이 그러하듯 그의 인생 역시도 변절로 얼룩졌다. 무엇이 그에게 그와 같은 길을 걷게끔 만들었을까. 악명 높은 친일파 윤덕영조차도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자 과거 시험에 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머리가 너무 비상한 나머지 일제 부역이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사는 길일 거라 판단하고 발 빠르게 행동에 나섰을 리도 없다. 그들은 시대와 사회에 충실했을 뿐이다. 무엇이 정의인지 묻기에 앞서 무어가 됐건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대의 명령에 충실히 응한 결과가 곧 친일이었다. 자신은 그저 명령을 불복종하기엔 무력한 존재였기에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무책임한 변명으로 일관했던 아이히만과 그들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애국을 부르짖으며 그릇된 길을 걸은 많은 이들을 떠올리니 천도교의 행보가 더욱 위대하게 느껴졌다. 진정한 영웅은 스스로를 애써 부각시키지 않는다. 천도교도 그랬다.

전수정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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